역시 보뱅. 너무 좋다. <환희의 인간>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

그에게 글쓰기는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기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재와 함께 머물고 기다리며 존재를 감각하는 과정이다. - P127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속 정원의 광채에 눈이 부신, 빛무리에 둘러싸인 동정녀처럼, 그녀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홀로 있다. 고독한 사람들은 시선을 끌어당겨서 그들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 커다란 유흑을 젊어진 그들은 선명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당신 앞에 있지만 동시에 부재하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관심을. - P11
그러나, 거기서 당신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책을 만난 것이다. 책과 함께라면 당신은 더 이상 선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독서는 대립 없는 삶이며, 선택의 강요로부터 면제된 삶이다. - P24
당신은 순서도 이유도 없이 읽는다. 독서는 강요될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 그것을 결정할 수 없다. 독서는 사랑이나 맑은 날씨와 같아서 아무도, 심지어 당신조차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읽으며, 당신이 읽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이다. 독서란 피의 유치원에서 스스로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발견해 낸, 결코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는 일이다. - P25
우리는 아이에게 수없이 말한다. 어서 크라고 제촉하면서 나이가 주는 단조로움 속으로 아이를 밀어 넣는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말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욕망과 더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려는 은밀한 바람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런 빈말은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 말은 아이의 공상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 P37
삶의 아주 초기에, 이미 모든 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 삶의 아주 초기에, 이미 끝이 찾아온 것이다. 모든 삶은 그 기원부터, 그 여명부터 소멸을 항해 나아가도록 정해져 있다. - P37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이라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푸르른 섬들에 다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녀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욱 감미로운 일이다. 부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랑. - P51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지친다. 그래도 ‘그것‘ 그 초목의 잎, 그 빛. 그 이름이 있다. 때때로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따로 떨어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낡지 않고 변치 않았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선택했던 처음 그날처럼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이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을 비추며,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음을. - P70
당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되돌려 준다.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곧 당신 자신이 된다. - P71
그것 외에는 쓸 것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서 노래할 것은 삶 속에서 사라진 사랑뿐이니까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꽃의 향기를 모으듯 글을 쓴다. 치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잎 위의 갈색 반점, 곧 사라질 젖니에 깨물린 흔적 같은 자국, 지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림 외에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82
사랑이란 단순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신비롭다. 복잡한 것은 결코 신비롭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목소리만큼 단순한 것은 없다. 목소리만큼 신비로운 것은 없다. - P90
그녀가 자신의 삶에 대헤 이야기한다. 당신은 몇 시간이고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직 성스러운 말, 시간의 겹에서 끌어낸 말만을 들을 것이다. 들리는 것은 오직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말뿐이다. 세상을 위해 쓰이는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병든 말이다. - P97
당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늦장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술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삶에서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 년은 한번 짓는 미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십 년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단 하나의 행운, 단 하나의 축복뿐임을 생각한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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