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읽을때는 잘 몰랐는데, 두번 읽으니까 완전 좋아졌다. 너무 좋았다.








<사랑>

출연자들이 사흘 동안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노정훈 씨, 이혜정 씨 그리고 다른 모든 출연자들도 캠프 애드벌룬 안에서 오직 한명의 개인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 이 진짜 사랑일까.‘ 선우는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건에 얽매인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네이키드 상태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이었다. - P20

<사랑>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러브 애드벌룬의 세계도 그랬다. 첫 번째 선택은 예선에 불과했을 뿐이고 결선은 그 다음이었다. 예선전을 통과한 남녀는 - 미래의 연인 후보를 향해 - 미리 적어낸 편지 형태의 자기소개서를 묵독으로 읽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그녀를 둘러싼 외적인 환경을 그녀/그는 비로소 알게 된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제각각의 결정이었다. 이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것인지 아 니면 그냥 여기서 걸음을 멈출 것인지.
그건 좀 그러네요.
설이 중얼거리자, 잔인하죠, 라고 선우가 대답했다. - P21

<사랑>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 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선우의 느낌표가 환청처럼 귓가에 부서졌다. 두 사람 의 유튜브 영상에서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 또 봅니다. 사랑의 첫 순간에 대해 생각하면 저 는 항상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 P24

<사랑>

사랑이 고정불변한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착각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인데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원형 통에 담으면 또 원형이 되는 거죠. - P35

<사랑>

그러면 저 혼자도 할 수 있어요. 싱글 대디와 사춘기 아들이 좌충우돌 살아가는 얘기도 그림 괜찮을 겁니다. 그쪽이 더 감동적인 사랑일 수도 있어요. 설은 남자의 눈을 보았다. 퀭한 눈, 퀭해서 슬픈 눈이 었다.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으로 풍화를 견디는 중이었다. - P35

<이별>

정화가 외롭다는 말을 하려 한다는 걸 민영은 알았다. 나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정화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비웃음을 담아 빈정거렸다. 민기는 정화의 속뜻을 매번 알아채질 못했다. 정화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고 여겼다. 그리고 타인 앞에서 정화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 P56

<이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이죽거리는 정화의 말투를 닮았고,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만 체면을 차리는 민기의 성격도 닮았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자신의 단점이 정화와 민기를 보고 있자면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 P57

<이별>

정화와 민기의 다툼이 어린 시절 민영에게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주었는지가 떠올라서였다. 공과금을 한 달 연체했다거나 드라마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도 정화와 민기의 대화를 거치면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민영은 자기 방에 들어갔고, 문에 귀를 댄 채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몸이 너무 떨려서 몸이 떨리는 소리가 문 바깥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떨림을 멈추려고 숨을 참게 되었고, 너무 오래 숨을 참아서 죽을 것 같았다. 이제 정화와 민기의 다툼은 민영에게 어떤 떨림도 일으키지 않았다. 민영은 노트북을 켜둔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화와 민기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졸음이 온다는 게 반가웠다. - P59

<이별>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 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민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화와 자리를 바꿨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듯 정화는 운전대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P69

<죽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몸은 의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고깃덩이에 불과해. - P76

<죽음>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담담한 척했다.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고, 연인의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의 귀환은 기쁜 일이다. 그가 요절했을 때 아파했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질투하고 토라질 게 아니라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고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일까. 왜 그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 P89

<죽음>

만약 그의 기억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졸탄은 물었다. 부활한 그가 목소리도 얼굴도 전과 다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모어와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고, 되살아난 스스로를 인지한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건 다르죠. 몸이 다르면 존재도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심장 이식수술을 한 사람은요? 전신 성형을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고로 뇌에 손상이 생겨서 성격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인가요?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 P95

<죽음>

졸탄을 들은 건 그즈음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엄청난 소동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졸탄과 그의 와이프가 대판 싸웠다는 것이다. 부활까지 해서 부부 싸움이라니. 하지만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졸탄의 와이프는 다시 죽길 원했는데 죽을 방도가 없었단다. 예전에는 면도날로 손목을 긋거나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리면 됐는데 홀로그램이 된 지금은 어떻게 자살해야 하나. 자살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데 그 문제가 원천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졸탄은 잘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죽느냐 마느냐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축복 아니냐고, 이제 셰익스피어나 카뮈는 그만 읽을 때가 됐다고 말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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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15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별 죽음은 바로 사람이 사는 거군요 본래 소설이 사람 사는 이야기군요 두번 보니 더 좋아졌군요 새파랑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5-15 09:26   좋아요 1 | URL
이 책 좋더라구요~!! 리뷰 잘 써봐야겠습니다. 희선님도 즐거운 한주 시작하세요~!!

페크pek0501 2023-05-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이 좋네요. 잘 쓰는 작가 세 분이 썼나 봅니다. 이런 글은 필사하는 재미가 있지요.

새파랑 2023-05-15 22:50   좋아요 0 | URL
짧지만 임팩트가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전 셋다 너무 좋았어요 ㅋ 여기 실린 작가분들 책을 찾아 읽으러고 합니다 ^^

시간의흐름 2023-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거다, 눈물 훔치고 갑니다. 새파랑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