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에 읽은 가장 좋은 책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림같은 소설이란게 이런걸까 싶다.

오백 년 전에 말이야, 그 목소리가 말한다, 세 명의 현자가 판사 누쉬란 앞에서, 슬픔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바다에서 가장 무거운 파도가 무엇일까를 놓고 논쟁을 벌였거든. 이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 같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야리다. 첫번째 현자는 병과 고통이라고 했지, 야리가 계속 말한다. 또 다른 현자는 나이듦과 가난이라고 했어. 세번째 현자는 죽음에 가까워졌는데 할 일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지. 결국 세 현자는 마지막이 최악이라는 데 동의를 했어. 죽음에 가까워졌는데 할 일이 없는 상황이라고. - P66

평평함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지금 신호수가 가로지르는 평원에서, 인간은 지난밤의 폭력을 알지 못한다. 시체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는. - P79

마렐라, 지노가 다시 편지를 보냈어. 이렇게 적혀 있어. 니농, 전혀 이해가 안 돼, 네가 나를 바람맞히다니. 거북이 반지도 돌려주고, 아무 말도 없이 우편함에 넣어 두었잖아. 크레모나까지 와서 나를 만나지도 않고 가다니. 네가 이 편지를 언제 받게 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너를 찾아낼 거고, 너를 계속 사랑할 거야. 어느 날 아침, 네가 어디에 있든, 잠에서 깨면 나의 메르세데스가, 옆에 ‘멋진 옷(VESTITI SCIC)‘이라고 적힌 그 차가 현관 앞에 서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날 아침엔, 다시 침대에 들어가게 될 거야. 니농+지노사랑. - P79

저 자신을 선물로 내주는 일이 사라져 버린 거예요. 저를 주는 건, 죽음을 주는 것이니까. 언제나, 제가 죽는 날까지요. 길을 걷다 보면 젊은 남자들이 저를 쳐다봅니다. 그러는 내내 저는 제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하죠. 누군가 제게 가까이 다가오고, 한번, 두 번, 백 번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고, 제가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는 죽는 거예요. - P80

다른 병들은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오면, 생명이 훅하고 꺼지죠. 이 병은, 니농의 이 병은, 서서히 삶에서 버림받는 겁니다. 몸의 부분 부분이 차례로 말을 듣지 않으면서, 삶이 무너지는 거죠.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어요, 성스러운 성모님? 아이의 능력이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씩 하나씩요. 밤도 별도 없고,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병실만 있는데, 다른 사람이 거기 머무를 수도 없어요. 약을 먹으면 죽음의 속도를 잠시 멈출 수 있지만, 대신 몸이 아픕니다. 그렇게 잠시 멈춰 놓은 동안에는 고통과 시간이 있을 뿐, 희망은 없죠. - P89

제 아이는 성모님의 딸이기도 합니다.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바라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무엇이든 바꿀 수 있게 해 주세요, 성모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립니다. 성모님은 조각상이니 고개를 돌리지 않으시겠죠. 사람들은 두려운 거예요. 저도 두렵습니다. 성모님은 조각상이니 차분하시겠죠.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어떻게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까요? - P89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지노? 제가 말해요.

물살을 거슬러 가는 거야, 그가 대답하죠. 그래서 포 강의 하구를 건너고, 거기 있는 섬에 갈 거야.

물살을 거스를 수는 없어.

아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될지를 보여 주려는 거야. 자기랑 내가. - P95

사랑도 그런 거 아니겠냐. 너한테는, 사랑이 텅스텐만큼이나 무겁겠지. 너는 그 프랑스 아가씨에게 네가 줄 수 있는 건 모두 주고 싶겠지. 그렇다면 잘 나눠서 따로 생각해 보자. 너는 그 아가씨를 사랑하지. 그 아가씨는 죽을 테고, 죽는 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아가씨는 더 빨리 죽을 거야. 그렇다면 서둘러라. 너희가 아이를 가질 수는 없겠지. 그 꺼림칙한 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P100

최악은 그들의 말이 아니었어요. 최악은 그들이 저를 너무 미워 한다는 사실이었죠. 저에 관한 모든 걸 미워했어요. 누군가의 모든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죠. 그 사람들은 모든 걸 미워했어요. 하나도 남기지 않고. - P117

이 친구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저나 선생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알 거예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는요,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그 일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죠. 그 일이 지나갔을 때를 말입니다. 이 친구는 아니에요.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생각합니다. - P133

벤치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정리된 가방을 열고 다이어리와 몽당연필을 꺼낸다. 6월 7일이라고 적힌 면에 똑바로 선 손글씨로 적는다. "이 날들이 끝나지 않게 하라, 이 날들이 마치 몇 세기처럼 오래가게 하라." - P162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제가 한 일은 ‘스텔라‘라는 말을 지어낸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노에겐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니농은 죽은 셈 치라고 했죠. 죽은 거라고. 니농이겪었던 일을 겪으면 누구나 죽을 만큼 힘들 거예요. 기다리라고, 그럼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니농이 두번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정말 그녀를 원하면 그렇게 하라고 제가 말했어요. 지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놀랐어요. 지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거든요. 니농의 두번째 삶은 우리 결혼식으로 시작할 거야, 지노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 전에 두 사람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 P179

루카가 자동차에서 결혼식 케이크를 가지고 나온다. 오단 케이크는 세 가지 색으로 설탕을 입힌 오렌지 꽃 모양 장식을 뿌렸다. 맨 꼭대기의 은빛 단에는 ‘지농(GINO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다섯 글자밖에 안 되지만, 거기 두 사람이 다 들어가 있어, 루카가 말한다. 꽃 장식을 마친 후에야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미미한테 말했지. 내가 어떻게 할 건지 알아? ‘지농‘이라고 쓸 거야. 두 사람이 한 단어에 들어가게 말이야!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과수원에 있는 머리 서른 개 달린 생명체의 이름이 된다. - P184

여성 시인 아니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이제 당신을 떠납니다.저의 눈앞에 죽음이 어두운 장막을 드리웠네요. 제가 가는 곳은 어둠이에요. - P185

신기한 것은, 음악이 흐르면 그 장소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종 음악은 몸 안으로 들어온다. 더 이상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자리를 잡는다. 두 개의 몸이 춤출 때, 그 과정은 빠르게 일어난다. 그때 연주되는 음악은 춤추는 이들의 몸을 통해 들린다. 마치 녹음된 음악처럼, 백만 분의 일 초의 시차를 두고, 이미 음악이 그들의 몸 안에서 진동하는 것만 같다. 음악과 함께, 희망도 몸 안으로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을 나는 피레우스에서 알게 되었다. - P191

밴드가 연주를 멈추고 지노는 니농을 바라보며 말한다. 할 수 있잖아, 행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깊은 키스를 한다. 행복의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흐른다. 영원 앞에서 뭘 하면 좋을까? 느긋하게 시간을 가지는 거지. 신발 벗고 출까? - P192

더 많은 마을 주민들이 무대 위에 오른다. 밴드가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나이 든 여성들이 다시 한번 몸 안에서 음악을 느끼기 위해 짝을 맞춰 춤춘다. 음악은 상실 앞에서 울부짖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실은 곧 기도가 되고, 기도에 담긴 희망에서 노래가 시작되지만, 그 노래는 자신의 출발점을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안에서는, 희망과 상실이 짝이 된다. - P193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라 버린 입에 물이라도 몇 방울 넣어 주기 위해, 그는 주사기를 사용해야만 할것이다. 기력이 떨어진 그녀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을 테고, 겨우 눈빛으로만 그에게 묻고, 혀끝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 옆에 누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그녀는 간신히 힘을 내어 손을 허공에 들어 올릴 것이다. 그가 그 손을 잡을 것이다. 거북이 반지가 그녀의 넷째 손가락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손이 허공에 떠 있을 것이다. 거북이는 바깥을 향해, 멀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눈은 그녀를 따라 영원 속으로 향할 것이다. - P198

심장이 새겨진 타마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신호수가 "전부 다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혹은 알았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타마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양철이 아니라 목소리들로 만든 타마. 그 타마가 여기 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이 타마를 촛불 옆에 두시기를… - P199

제 생각에 인생에서는요,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해 의미를 주는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인 것 같아요. 아끼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이요. 지금 제 생각은 그래요, 프랑스 아저씨. - P126

한 줌 눈이면 훌륭하지
여름의 열기에 힘들어하는 남자의 입에는
봄바람이면 훌륭하지
항해에 나서려는 선원들에게는
홑겹 이불 하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하지
침대에 누운 두 연인에게는 - P5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2-10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려 2023년 올해의 책이라고요?! 저도 이미 가지고 있는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파랑 2023-02-10 18:56   좋아요 0 | URL
역시 이작가님에게는 없는게 없군요 ^^ 나중에 이작가님 세번째 저서에 이 책이 포함되어 있기를~!!

햇살과함께 2023-02-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좋은가요?!
존 버거 맨날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새파랑 2023-02-15 19:47   좋아요 1 | URL
전 완전 좋았습니다~!! 딱 제취향이더라구요~! 이제 읽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