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소세키는 너무너무 좋다. 그 후는 특히 완벽하다.

그가 보기에 이 청년의 머리에는 소의 뇌가 들어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이야기를 시켜보면
보통 사람의 절반 정도밖에 따라오지 못한다. - P44

다이스케는 꽃병 오른쪽에 있는 조립식 책장
앞으로 가서 위에 올려놓았던 무거운 앨범을 손에
들었다. 금으로 된 잠금 쇠를 풀고 선 채로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중간쯤 이르러 갑자기
손을 멈췄다. 거기에는 스무 살쯤 된 여자의
상반신 사진이 있다. 다이스케는 눈을 내리뜨고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 P49

"곧 돌아오게"라고 말하며 히라오카의 손을
잡았다.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의 말에 "하는 수
없지. 당분간은 참아야지"라고 내뱉듯이 말했으나
그의 안경 너머로는 부러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표정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다이스케는 갑자기 친구가 미워졌다. - P59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 발을 디뎠지. 특히 자네와
헤어진 뒤로는 세상이 아주 넓어진 느낌이야.
단지 자네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성격이 다를
뿐이지."

"그런 식으로 허세를 부려봤자 곧 무릎 꿇고 말
걸세." - P69

"미치요(三千代) 씨는 잘 지내고 있나?"

"물어주니 고맙군. 여전히 잘 있네. 자네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실은 오늘 함께 오려고
했는데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오느라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여관에 있으라고 하고 나왔네." - P85

"조상이 만든 인연보다는 자신이 만든 인연으로
결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다이스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 P140

그는 인생에서 처세라는 사다리를 한두 계단
오르다가 헛디뎌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그 순간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상처를 입지는 않았어도 실제로 정신적으로는
이미 큰 타격을 입은 듯했다. 처음 재회했을 때
다이스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생각해봤을 때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은 아닐까도 싶었다. - P159

‘그때는 아무래도 내가 미쳤었지.‘ - P162

미치요는 아름다운 선이 곱게 겹친 선명한
쌍꺼풀눈을 지녔다. 눈은 가늘고 긴 편이었는데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을 때면 눈이 굉장히 커 보였다.
다이스케는 검은 눈동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치요가 결혼하기 전에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그런 눈매를 자주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미치요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얼굴 윤곽이 다 그려지기도 전에 검고 젖은 듯한
눈매가 퍼뜩 떠오르곤 했다. - P167

다이스케는 러시아문학에 등장하는 불안을 그
나라 특유의 날씨와 정치적 압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프랑스문학에서 엿보이는
불안은 유부녀의 간통이 많기 때문으로 보았다.
단눈치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문학에서의 불안은
무절제한 타락으로 인한 자기결손의 감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본의 문학가가 굳이
불안이라는 측면에서만 사회를 묘사하는 것은
서구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 P226

오늘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그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감을 메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 3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어느새 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254

결국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볼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야. 누구든 바쁠 때는
자신의 얼굴 따위는 잊어버리게 되지." - P269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일을 한다면 단지 생계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명예로운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노력이란 빵과는 거리가 있는
법이네. - P270

"그것 보게.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그 수단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할 방법을
찾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러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지 않을까?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순서가 다른 것의 방해를 받게 된다면 그런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 할 수 있지." - P272

다이스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신붓감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듣자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미치요라는 이름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런 다음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돈을 빌려주십시오‘라는
말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저 쓴웃음만 지은 채 형수와 마주
앉아 있었다. - P317

히라오카는 마침내 자신과 멀어지고 말았다. 만날
때마다 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히라오카뿐만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더라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현대사회란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대지는 자연과
이어져 있지만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금세
조각조각 나버린다. 집 안에 있는 인간 역시
조각조각 나버린다. 다이스케는 문명은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 P360

그는 히라오카를 대할 때마다 느껴지는 원인 모를
불쾌감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다만 미치요만을
위해 히라오카의 상황을 걱정할 만큼 히라오카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히라오카 자신을 위해 역시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 P414

조금 전에 미치요가 들고 들어온 백합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있었다. 달콤하고 강한 향기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다이스케는 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자극을 코앞에 두고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멋대로 치워버릴 정도로 미치요에게
거침없는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 P434

다이스케는 그 답례로 대개는 새로 나온 서양문학
책을 보냈다. 그러면 답장에는 보내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증거 같은 비평이 꼭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서신 교환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책을 받았다는 인사도 없었다. 자신이
일부러 물어보면 책은 고맙게 잘 받았다, 읽고
인사를 하려다 보니 이렇게 늦어졌다, 실은 아직
책을 읽지 않았다, 자백하면 읽을 시간이
없다기보다 읽고 싶은 마음이 없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답장이 왔다. 다이스케는 그 후로
책을 보내는 대신에 최신 장난감을 보내기로 했다 - P512

그러자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이런 논리에
의해 그저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머리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 P517

그는 부자간의 인연을 끊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서 경제적인 지원이 끊기는 점이
두려웠다. - P583

그는 현재의 미치요를 결코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병든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가엾게
여겼다. 그는 아이를 잃은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가엾게 여겼다. 그는 남편의 사랑을
잃은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가엾게 여겼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가엾게 여겼다. 다만 다이스케는 이들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 영원히 갈라놓으려 할 만큼
대담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무분별하지
않았다. - P604

그제야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 P608

"자네도 많이 변했군."
"자네가 변한 것처럼 변해버렸지. 각박한 세상을
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군. 그러니 좀
기다려주게." - P624

만일 이 부부가 자연의 도끼에 의해 둘로
갈라진다면 자신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미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부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신과 미치요는 그만큼 가까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628

다이스케는 백합을 바라보면서 방을 가득 채운
강한 향기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는 그런
후각적인 자극 속에서 지난날 미치요의 모습을
분명하게 떠올렸다. 그 과거 속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옛 그림자가 연기처럼 휘감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처음으로 자연스러웠던 옛날로
돌아가는군.‘ - P697

"내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해요.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 P717

"너무하세요."
흐느끼며 말하는 목소리가 손수건 너머로
들려왔다. 그 말이 다이스케의 청각을 전류처럼
자극했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고백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고백을 하려면
미치요가 히라오카와 결혼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그는 흐느낌 사이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미치요의
이 한마디를 듣고 견딜 수 없었다.
"3, 4년 전에 당신에게 그렇게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 P719

‘모든 것이 끝났다.‘ - P731

"난 미치요 씨를 사랑하고 있네."
"남의 아내를 사랑할 권리가 자네에게 있나?"
"어쩔 수 없어. 미치요 씨는 물론 자네 소유야.
하지만 물건이 아닌 인간이니까 마음까지
소유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지. 본인 외에
그 어떤 사람도 애정의 정도나 대상을 명령할
수는 없지. 남편의 권리도 거기까진 아니야.
따라서 아내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옮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남편의 의무가 아닐까?" - P837

이제 와서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세속적인
형에게 동정을 받으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만족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어 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자신을 빨리 태워 없애기를 간절히
바랐다 - P869

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 - P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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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1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옹의 <그후>는 명작 !^^

새파랑 2022-11-22 07:05   좋아요 0 | URL
아 오늘부터 <그 후>를 저의 소세키 원픽으로 ^^

레삭매냐 2022-11-25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선생 책들을
이책저책 수집해 놓았는데
미처 읽지는 못하고 있네요.
참 내...

어디 그런 책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요.

새파랑 2022-11-25 12:13   좋아요 1 | URL
<그후> 리뷰 쓰려고 하는데 아직 못썼네요 ㅋ 저는 이 책이 소세키 책중 가장 좋은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