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몰입하면서 감명깊게 읽은 시집은 처음이었다. 평생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시집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 한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몸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그 넓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비극이다.
포도 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희망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많은 기다림의 직립과 살아 있지 않음들 또한 땅에 묻히리라 잊혀지리라
가끔씩 낯선 시간 속에서 뒤늦게 폭발하는 불발탄의 기억에 매운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생을 낙오하는 조준선 위로 떠오르는 몇 소절 누군가의 후렴에 눈살 찌푸리며 따라 일어설 추억들이란 간직할 것이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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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3-30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다 하셔서 누구지? 했는데, 기형도 시집이었네요.
새파랑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03-31 06:49   좋아요 1 | URL
전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이번에 처음 읽어봤는데 정말 좋네요 ㅋ 시가 이렇게 좋다는데 대해 깜짝 놀랐습니다 ^^

모나리자 2022-04-01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문장들이 가득하네요.
너무 빨리 떠나 시인.. 지금도 엄청나게 사랑받고 있는데 살아 생전에 이렇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좋은 시는 독자들이 알아보나 봅니다.
저도 기형도 시인의 시집 읽어봐야겠네요.^^

새파랑 2022-04-01 16:30   좋아요 1 | URL
제가 시집을 잘 못읽는데 이 시집은 정말 좋더라구요 ㅋ 간만에 성공한 시집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