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별 대단한 차이는 없었다. - P11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망이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지도를 만드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라는 말을 할때마다 더듬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안 더듬기도 했지만, ‘지도‘라는 말이 나올 때만큼은 백 퍼센트 확실히 더듬었다. - P15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동안 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투명했다. 그녀의 눈이 이렇게 투명하다는 것을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조금 신비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투명감이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다. - P21
"요즘 계속 그래. 정말말을 잘 못하겠어. 무슨 얘길 하려고 하면 항상 엉뚱한 말만 떠올라. 엉뚱하거나, 완전히 반대거나. 그래서 그걸 고치려고 하면 이상하게 더 혼란스러워져서 엉뚱한 말이 나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려.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나뉘어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한가운데 아주 굵은 전봇대가 서있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제대로 된 말은 언제나 또하나의 내가 갖고 있고, 나는 절대로 쫓아가질 못해. - P25
"누구에게나 많건 적건 그런 느낌은 있어."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종종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초조해해." - P25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내 안에 무언지 모를 부연 공기 같은 것이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공기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태를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런 말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P29
여자와 자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와 자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등을 돌린 채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 P39
나는 그녀의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한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 드는 느낌과도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런 기분을 어디로 가져갈수도, 어디에다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 P42
그녀는 처음부터 나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나는 기혼이었지만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이니 가정이니 수입이니 하는 것은 발 크기며 목소리 톤이며 손톱 모양과 같이 순수하게 선천적인 것이라고 믿는듯했다. 요컨대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거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 P51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내가 물었다. 잠깐 멍하니 있었던 탓에 잘못 들은 것 같아서였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반복했다. - P64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린다. 우리집 근처의 헛간은 여전히 한 곳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헛간이 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또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 P80
"그러나 이걸로 끝난 건 아냐." 난쟁이는 말을 이었다. "넌 몇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야. 네가 한 번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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