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넘어가는 우리역사 5 - 대한제국부터 통일운동시대까지
한우리역사독서연구회 엮음 / 해와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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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궁궐 건물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전각으로 유명하다.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으로 석조전이라고 부르는데, 190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09년에 완성되었다. 이 건물은 영국인이면서 대한 제국의 재정 고문이었던 브라운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짓게 되었다. 영국인 하딩 등이 설계하였고, 1905년부터 일본의 오쿠라 토목 회사가 공사를 맡아 완성하였다. 그런데 우코라는 뒷날 조선의 궁궐을 파괴하고 문화재를 빼돌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석조전은 1946년 미,소 공동 위원회가 회의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국립 박물관과 현대 미굴관 등으로도 쓰였다. 지금은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비록 약한 나라이기는 한지만 문화재로는 많은 양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남의 나라의 도움으로 인하여 건죽물들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많으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중명전은 고종 황제가 덕수궁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서양식 전각이 여러 채 세워졌다. 정관헌, 중면전, 돈덕전, 구성헌, 환벽정, 석조전 등이 모두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은 건물은 정관헌과 석조전, 그리고 중명전뿐이다. 지금 중명전은 덕수궁 돌담길 바깥쪽에 있든데, 그건 일제가덕수궁 터를 나누어 팔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수궁 터는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중명전 등의 건물은 덕수궁 밖으로 내쫓긴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 내용을 보면서 알게된 점으로는 우리나라는 많은 문화재와 문화유산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때 당시의 허술한 경계로 인하여 많은 양의 문화재가 회손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역사가 많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때만이라도 잘 버텼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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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넘어가는 우리역사 4 - 임진왜란부터 갑오개혁까지
한우리역사독서연구회 지음 / 해와나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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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때의 이야기를 적은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이고 어머니는 해경궁 홍씨이다. 1762년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 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이 될 수업을 바았다. 그리고 1775년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문화 정치를 추진하였으며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여 인재를 키워내었다. 또한 각종 서적을 편찬하고 새로운 활자를 개발했다. 정조는 당파 싸움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던 만큼 영조에 이어 강력한 탕평책을 실시한다. 당파에 상관 없이 인재를 등용하였고 첩의 자식이라도 능력만 뛰어나면 벼슬을 주었다. 또한 실학과 북학의 장점을 수용하고 장려하였으며 중인 이하 계층의 문학과 예술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 밖에 농업 발전과 형벌 제도 개선, 세금의 합리화 등 백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도 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왕중에서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천민이라는 제도에서 능력이 있으므로 벼슬을 주는 왕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다른 외국의 왕이나 황제 등도 가난한 사람이나 천민들에게는 계급을 주지 않았겠지만 우리나라의 왕은 우리나라의 문화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민까지 벼슬을 준다는 것이 참 멋지고 자랑스럽다. 

  유향소는 벼슬에서 은퇴한 사람 중에서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지방관이 나쁜 행실을 막기 위한 민간 자치 기구였다. 경재소는 지방 관청의 서울 출장소로 정부와 유향소 사이에서 연락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서 사람이 벼슬에서 내려와도 마을의 잘못되어진 부분을 자신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권리와 그 내용을 정부에 신고할 수 있는 권력과  그에대한 문제점의 벌을 줄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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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넘어가는 우리역사 3 - 조선 건국부터 을사사화까지
한우리역사독서연구회 지음 / 해와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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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박제상의 이야기 부터 문무왕까지의 전설된 이야기를 쓴 이야기 들입니다. 저는 이책에서 몇몇 이야기들만 정리하여 썼습니다.

 신라의 내물왕 때에 눌지왕은 어린 왕자였다. 어느날 왜의 사신들이 와서 신라와 친하게 진해자고 하며 눌지왕은 자신의 막내아들 미사흔 왕자를 왜로 보냈지만 왜는 미사은 왕자를 보내어 주지 않았다. 얼마 후 고구려의 사신이 찾아와 자기의 나라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자고 하자며 왕자 한명을 달라 하였다. 눌지왕은 복호를 보내었지만 고구려는 복호를 보내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눌지왕은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용감하고 지혜로운 박제상을 복호와 미사흔을 대리고 오하 햐였다. 박제상은 복호와 미사흔을 신라의 땅으로 돌려 보내었지만 박제상은 왜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해변가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돌이 됬었다. 이 돌이 바로 치술령의 망부석이다. 

 신라의 신무왕이때 이야기다. 어느날 바다에서 산 하나가 배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왕은 이 일을 이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왕은 이 일을 유명한 점쟁이인 김춘칠을 불러 이야기 하니 김춘칠이 대답하기를 돌아가신 문무대왕께서 용이 되었다고 하고 바다에 나가면 아주 좋은 선물이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우선 신하들을 그 산에 보내었다. 그곳에 갔다온 신하들의 말로는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그 대나무는 낮에는 둘로, 밤에는 하나로 된다고 하였다. 왕은 기 이야기를 듣고 산으로 가는 도중 용과 마주쳤다. 용은 신무왕의 아버지인 문무왕이 바다속에서 큰 용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용은 대나무가 꼭 합쳐져 이씨을 때만 나무를 배어서 피리를 불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대로 따랐다. 그 피리는 병자를 고쳐주고, 가뭄때는 비를 내리고, 홍수때에는 비를 그치게 하였다. 이 피리가 바로 만파식전 이다. 

 난 이 책을 읽으며 예전의 이야기들을 새로 알게되어서 참 좋았다. 사회 역사공부에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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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넘어가는 우리역사 2 -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우리역사독서연구회 엮음 / 해와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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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내용을 적은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 이후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불렀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정했었다. 또 궁예가 901년에사용한 나라 이름도 고려이다. 하지만 궁예의 고구려는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옛 고구려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궁예의 본래 이름은 선종이었다.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난 뒤 이름을 궁예로 바꾸었다. 궁예란 말은 활의 후예 즉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의 별칭인 주몽을 닮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서 궁예는 비록 백성들에게 악독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또한 만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분과 고구려를 만든 뜻과 의지는 다른 사람들 보다도 훨씬 나았다. 비록 자신의 힘이 강하다 하여 자신의 선한 마음이 깊숙히 들어져간 것이지 없어진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민죽 통일이라고 여긴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지 못했지만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을 적극받아들였다. 발해 태자 대광현을 비롯해 무려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고려에 왔기 때문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서경을 제 2의 수도로 삼았다. 따라서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민족의 재통합이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생각이 된다. 삼국시대 때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대신 고구려의 영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고, 그 나라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한 반면 후삼국시대 때에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였고 다른 나라의 도움이 없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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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삼국유사 5 - 민족문화문고
민족문화추진회 엮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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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신라 등의 삼국시대때의 이야기를 적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귀신을 물리친다는 밀본 법사가 삼국시대때 있었다. 인예 스님은 처음 본 밀본 법사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밀본 법사에게 간사하고 아첨을 일삼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본 법사는 그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인혜 스님은 자신의 신통력을 뽐내다가 밀본 법사에게 큰코를 다쳤다. 사람들 사이에는 지켜야 할 기본 예절이 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다가는 인혜스님처럼 될 수가 있다.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자신을 낮추는 법이다. 

  이 내용을 보면서 비록 이 책은 삼국유사때의 실제 이야기를 적은 책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 들에서 그때 당시의 이야기 등을 적음으로서 그때의 삷고 생활 모습을 알수 있었고, 또한 그때의 예절, 제도, 법 등을 알수 있다. 

  신라는 박혁거세가 사로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에 서라벌, 서벌, 계림으로 나라 이름을 바뀌었다가 지증왕 때 신라라는 이름을 정하였다. 신라는 김춘추, 김유신 등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훌륭한 인물이 많았다. 신라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항복시키고삼국을 통일하였다. 가야는 낙동강 주변에 살던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을 말한다. 철이 많이 생산이 되던 이 지역은 철을 이용한 여러가지 농기구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신라의 힘이 강해지자 신라에 합쳐져서 멸망되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신라와 가야때의 이야기를 잠깐동안 알수 있었다. 비록 가야는 신라에게 멸망되었지만 그 나라의 우수한 철기문화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었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그리고 또한 신라는 그러한 철기문화에 발달되어져 있던 가야를 짓발고 그 땅을 새로운 자신의 땅으로 만든 신라를 보면 그러한 철기문화를 꺾을 수 있었던 수만은 싸움전략과 정신력이 아주 우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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