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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 벵하민 라바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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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논픽션소설’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게 무슨 궤변인가 싶었다. ‘논픽션’과 ‘소설’이라는 상극의 두 단어는 한 어절 내에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논픽션소설’이라는 단어보다 더 정확하게 이 작품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등 유수한 과학자들의 연구 및 이론 등의 ‘사실’을 바탕으로 그들의 일생이라는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덧붙여 그 연구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던 이유를 설명하는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객관적 사실에 소설적 허구를 더했다는 측면에서 ‘논픽션소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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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중단편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아무래도 ‘양자역학’과 관련된 표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이다.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고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책을 통해 받아들인 양자역학을 설명해보자면, 양자역학은 자기 모순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모두 양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아무런 조직없이 움직이므로 예측이 절대 불가능한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들이 그들로써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운’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인간)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즉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운’ 때문이란 걸 간과하면 매우 끔찍하고 참혹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마치 전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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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물질 자체에 관계된 것이고, 만물이 창조되는 방식을 지배하는 원리이며, 어떤 현상이 완벽하게 정의된 특징들을 한꺼번에 가질 가능성을 배제하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애초 직관은 옳았다. 양자의 실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양자가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양자의 성질들 중 하나를 규명하면 다른 것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양자계를 기술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림도 은유도 아니라 숫자의 집합이다. (216-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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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도 너무 어려운데 이 작품에는 양자역학 외에도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때문에 읽으면서 ‘과학’이라는 어둡고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발버둥치는 ‘문과생’이라는 순한 양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과적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처음으로 나의 과문함에 대한 통탄의 심정이 들었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과학적인 지식이 있었더라면, 이 작품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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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인생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과학계에 지각 변동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성취를 일구어낸 과학자들의 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 한마리를 잡기 위해 몇달 가량 온몸과 온마음을 다 바치는 노력 끝에 결국 잡아내고야 마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모습이, 광기 어린 집착과도 같은 노력을 통해 세상의 통념을 뒤집어 엎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던 과학자들의 모습에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과학적 지식이 일절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살아가면서 이 정도의 혹은 반의 반 정도의 노력을 한번이라도 해보았는지, 노력없는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교훈을 선사하는 이 책을, 이과 문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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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슈바르츠실트는 신들린 사람처럼 일하며 논문을 쏟아냈다. 복사에 의한 항성 간 에너지 이동을 분석하고 태양 대기의 평형을 연구하고 천체 이동 속도의 분포를 기술하고 복사 전달을 모델링하는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중략) 그는 물리학에 만족할 수 없었다. 연금술사들이 추구한 지식과 같은 무언가를 열망했으며 자신조차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긴박감에 휩싸인 채 고투했다.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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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든 제 의지대로 자고 일어나 연구에 온 정력을 쏟을 수 있었다. 아침에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낡은 남포등의 불빛 아래서 눈을 찡그린 채 책상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친구 이브 라드겔레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천재와 함께 연구하는 일은 매혹적이었다. 이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9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