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오늘의 좋은 글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글에 관심이 많아 유심히 살펴보게 되는데 이번에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늘 하던 말 또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였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여대생이 자신의 서러운 사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살아보기로 마음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사연을 들어준 사람은 그녀가 자살하려고 가던 도중에 만난 생면부지의 아저씨였다는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는데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작년 하반기에 돌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를 밀어낸 책이 김난도<아프니까 청춘이다>입니다.책의 유명세 덕분인지 김씨는 신문에도 나오고 케이블 방송에도 나옵니다.방송을 보니 김난도 씨는 대학교수라기보다는 자상한 아저씨 같습니다.말도 크게 하지 않고, 남자인데도 다소 가느다란 목소리가 약간 여성적인 느낌도 납니다.이야기를 차분하고 조근조근하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신문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교사나 교수는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김 씨에 의하면 대학생들 중 자기 고민을 부모나 교수에게 털어놓는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부모나 교수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지요.김 씨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합니다.그렇다고 무슨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닙니다.그들도 분명한 해결책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김 씨를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그저 내 고민, 내 사연을 들어주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겠지요.
대학생들이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공감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지금의 기성세대는 그들에게 한말 또 하고 한 말을 또 할 뿐,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김난도 씨는 1963년생인데 특히 이 연배들은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우리 때는 최루탄 가루에 밥을 비벼먹었다.너희들은 왜 그렇게 의식이 없느냐...책도 안 읽는 놈들...우리 때는 전논과 해전을 달달 외웠다..." 등등 온갖 지적질을 해댑니다.전논과 해전이 뭐냐고 물어보면 "야...너희들은 전환시대의 논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모르냐"고 핀잔을 줍니다.대학생들에게 지금의 40~50대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휴머니타스 대표인 박상훈 씨는 우리나라 진보지식인의 단점으로 독선적이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기확신이 지나치고 독설이 심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이런 사람들이 대학생들의 아픔이나 고민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요.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에게 훈계와 야단만 잔뜩 안겨줍니다.들어보면 다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번이죠.더군다나 잔소리라면...
1986년 신동아(몇 월호인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음)로 기억하는데 김신(백범의 아들. 공군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 때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냄)씨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요즘 데모 많이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서해 5도 견학을 시켜서 우리나라 안보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고 한 장면이 있습니다.꼭 지금의 40~50대들이 대학생들에게 하는 태도와 비슷합니다.그때의 대학생들이 이젠 기성세대가 되어 김신 씨가 자기들에게 하듯이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훈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요.
김난도 씨는 진보진영 인사가 아닙니다.지금도 조선일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하지만 대학생들의 고민을 일단 들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경청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김난도 씨의 이런 말조차 "값싼 위안거리다...현실을 호도하며 기존체제에 봉사하는 반동적 결과 운운" 하며 비난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그런 인간과는 정말 말조차 섞고 싶지 않습니다.남의 말을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한 사람이거니와 남까지도 불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불행까지 전염시키는 존재들! 불행해지려거든 당신들 혼자 불행해지라고 한마디 쏘아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