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소설가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지명도가 없는 편입니다.그래도 이윤기 씨 덕에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은 읽은 사람이 꽤 됩니다만 역시 에코보다는 선배 격인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작품은 이윤기 씨의 번역(창녀 아드리안)이 있어도 에코 작품에 비해선 통 팔리지가 않았습니다.이념문제를 파헤친 이그네치오 실로네 <빵과 포도주>도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그러니 2차대전이 끝나자 유행이 지나버렸다는 평가를 받은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오로지 시험문제 풀이를 위해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만을 봐야 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책 외에 신문잡지나 읽으면 다행입니다.그래도 숨 쉴 구멍이 있는 게 입시용 독서인데, 쉽게 말해 국어 시험 준비에 필요한 단편소설 읽기입니다.그런 작품 중 하나가 황순원,김동인,김동리,김동인,현진건,채만식...등등인데, 염상섭 역시 사실주의니 자연주의니 하는 문예사조를 거론하면서 나옵니다.그래서 억지로 한 번 씩 읽는 작품이 '표본실의 청개구리'인데 이게 뭔가...하는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일제시대에 상위 몇%에 들만한 배운 놈들이 나와서 뭐라 뭐라 잘 알지도 못할 말을 늘어놓는구나...그런 느낌이 들었지요.

   이 단편 초반에 친구들끼리 평양여행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성벽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친구인 H가 한마디 합니다."그렇게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니 이포리가 없는 게 한이로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그러자 주인공은 "내가 조르지오..." 라고 합니다.이 장면에서 나오는 이포리와 조르지오가 다눈치오의 <죽음의 승리>에 나오는 여자와 남자 주인공 이름입니다.이포리가 유부녀이고 둘은 극한의 격정적 애정을 나누는데 마지막에 절벽에서 서로 껴안고 자살합니다.일제시대에도 다눈치오의 작품이 일부 계층에나마 알려졌다는 증거가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이 장면에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위에 인용한 장면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뭐...희한한 소설이로군...하고 별 감동없이 읽었으니까요. 황순원 작품은 애잔한 감동이라도 있는데, 이건 그런 것도 없고...그런데 우연히 몇 년 전 <죽음의 승리>(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판)를 읽고, 야...이거 짜릿하구나! 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유미주의 계열 작품을 은근히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죽음의 승리>를 읽고 나서 며칠 후 우연히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었는데 그때 이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만약 <죽음의 승리>를 읽지 않고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었다면 그 장면이 눈에 들어왔을까요? 

   어린이나 청소년 시절 읽은 책은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보면 또다른 재미가 있습니다.아무래도 시간이 지나 지식이라든가 인생경험을 축적한 후에 읽으면 예전에 이해되지 않은 장면이 이해되기도 하고, 또 새로운 각도에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주니까요.더군다나 학창시절 교과서 자습서 참고서 외엔 거의 독서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읽은 책은 반드시 성인이 되어 한 번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그러면 "어...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었나..." 하고 놀랄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런 놀라움이 바로 예전의 책을 다시 읽어보는 참맛이 아닐까요.그래서 나는 몇 년 전 읽은 작품도 또 읽고 또 읽습니다.그러다 보니 어떤 작품은 10번 가까이 읽은 것도 있지요.그래도 짜릿한 놀라움을 맛보기 위해 이 독서습관은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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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10-2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성출판사 세게문학 전집 저도 있어요. 흐흐 지금 그 책 버릴까말까 생각중인데.... 세로줄인데다 더 이상 종이도 세월을 감당하지 못하네요.

노님 말에 동감입니다. 자꾸 고전을 애들한테 읽으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고전은 나이 차고 경험치 좀 쌓이면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데 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1 22:35   좋아요 0 | URL
금성 것엔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작품이 꽤 있으니 혹시 처분하더라도 그런 건 남겨두고 하는 게 좋아요.

고전도 워낙 종류가 다양하니 청소년 때 읽어야 더 와닿는 것도 있고....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있고...여하튼 어른이 되어서 읽어야 맛이 나는 고전이 있는 건 사실이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태리 소설가는 관심이 큰 프리모 레비와 이탈로 칼비노 밖에는 읽은 기억이 없네요. 물론 움베르토 에코도 종종 읽지만요.
앞의 두 작가는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는 생각입니다. 칼비노도 '그저 환상문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안에 담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은 높이 사둘만 한것 같아요. 소개해주신 작가들의 작품도 관심이 갑니다.
아무래도 이태리 문학은 중세의 고전에 관심이 편중된듯 해요. 보카치오나 단테가 그렇구요. 두 사람을 말하니 자연스레 고전의 의미와 연결되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0-10-22 00:09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나 이탈로 칼비노 모두 요 몇년 사이에 국내에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제가 위에 소개한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은 이제 시중에선 구할 수가 없어요.이그나치오 실로네<빵과 포두주>는 약 30년 전 한길사에서 아서 퀘스틀러<한낮의 어둠>과 합본으로 나왔는데 <한낮의 어둠>은 최근에 다시 나왔지만 <빵과 포도주>는 감감무소식...다눈치오의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루쉰P 2010-10-24 17:15   좋아요 0 | URL
이그나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는 카뮈의 전기를 읽다가 그가 극찬한 작가 였습니다. 그래서 미친듯이 일하던 헌책방에서 찾던 중 책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주차장'을 빌려 창고로 쓰던 곳인데 책이 바닦부터 위 천장까지 농담이 아니라 완전 채워진 공간입니다.ㅋㅋ)거기서 책을 정리하다가 아주 우연히 발견을 했습니다. 그 책을 발견했을 때 감동이란...^^ 정말 우리나라에서는 관심 있는 작가의 책은 찾기가 너무 힘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6 17:00   좋아요 0 | URL
허허허...정말 기뻤겠군요.지금은 시판되지 않는 책들 중 좋은 게 많습니다.한길세계문학에서 나온 책 중 지금은 안 나오는 책들이 대표적이죠.

cyrus 2010-10-22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상섭의 자연주의 소설에 저런 외국 문학이 언급되어 있군요.
간혹 문학 작품을 읽다가 다른 문학 작품이 언급되면
옛 친구 재회한거 같은 기분이 들고, 반갑기도 합니다.
윗 분의 댓글에서 말씀하셨듯이 다눈치오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접하기는
어려운거 같습니다. 에코나 칼비노보다 인지도가 낮으니까요.
그나마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이 이문열 작가의 세계명작산책 시리즈에
딱 한 편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2 15:29   좋아요 0 | URL
소설 속에 언급된 역사나 문학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지요.

다눈치오<죽음의 승리>는 아예 시중에서 구할 수조차 없으니까요.

그 책엔 이문열 씨가 단편들을 소개했지요.다눈치오 것도 있었군요.

blanca 2010-10-22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서 그 다눈치오를 만나게 되는군요. <죽음의 승리>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니 정말 아쉬워요. 로맹가리 어머니가 아들에게 다눈치오가 되거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저는 제대로 이해 못했군요. 표본실의 청개구리 갑자기 학창시절이 생각나서요.<삼대>는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친구들이랑 '너 따위를 두기가 불찰이다'라고 장난치던 기억이--;; 잘 읽고 갑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3 16:2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워낙 잊혀진 작가가 된 다눈치오인지라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지만 저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작가입니다.

장편인 <삼대>는 읽은 사람이 의외로 없는데 읽으셨군요.염상섭의 50년대단편들도 재밌는 게 많습니다.

이름 2010-10-24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눈치오를 여기서 보니 반가와요. 제임스 조이스가 가장 좋아했던 작기이기도 하고요.
이탈로 스붸보도 있지요. 프루스트 이상 글을 잘 쓰는 작가에요. 프리모 레비의 인터뷰를
보면 그와 자신의 공통점을 언급하기도 했더군요. 페인트 비지니스에서 일하는 것과 유태인이고 작가인점이요. 그리고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있죠, 그의 아내도 한때 더 유명한 작가였고요, 모란테이던가요? 이들외에 이태리의 훌륭한 작가들이 대거 있는데 빨리 한국에 다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다눈치오와 모라비아 모두 이태리 파시즘과 관련해서 꺠끗하지 못한
전적이 있는 것도 같고요. 모라비아는 유태인이면서도 비교적 안전하게 보호받고 적극
파시스트 정권을 비판하고 나서지 못해서 전후 상당히 죄의식에 시달렸을겁니다. 최근 그의
평전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서 번역된다면 아주 좋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0-24 15:17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제임스 조이스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름 님의 댓글에 관심을 가질 겁니다.이탈로 스붸보와 프리모 레비와의 관계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겁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문화혁명에 관한 르포를 쓰기도 했더군요.

알찬 정보를 알려주시니 저는 물론이고 이 곳을 자주 방문하는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1-0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네요. 움베르트 에코는 지지층이 있는데...
일점기에 인텔리들이나마 알았던 작가였다면... 아쿠타가와나 루쉰 이런 사람들의 동시대 사람이었겠네요. 윗 댓글에 2차대전 때 파시즘에 떳떳하지 못했다고 하니 20세기 초중반사람?
어쨌든 역시 소설이나 인문학 책에 인용된 책을 먼저 읽어보고 접하는 거랑 그 반대는
엄처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가장 기억나는 경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박완서 "그 여자네 집"에 나온 김억 번역의 "오뇌의 무도" 같은 거... 같은 나라 작가의 말인데도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더랬죠. 물론 지금도 오뇌의 무도는 본 적 없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0-11-06 21:29   좋아요 0 | URL
다눈치오는 2차대전 직전에 사망했구요, 모라비아는 1990년 사망입니다.다눈치오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라서 영토분쟁이 있는 피우메 점령에 공을 세우기도 했지요.전형적인 행동파 마초였어요.하지만 정작 파시스트 정권과는 마음이 안 맞았어요.

모라비아 작품엔 반파시즘적 작품도 있었습니다.

김억은 우리나라 번역문학에도 공헌을 했지요.

희망찬샘 2010-11-08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아이들에게 고전을 권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책 안 읽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고전이라는 이름을 단 책을 쪼금 더 읽었습니다. 읽어두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 제목 정도는 낯익으니까요. 책따세 추천 도서같은 거 보면 고전이 아닌 오늘의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목록들로 잘 구성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고전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라면, 시대를 넘은 진정한 고전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찾아 읽기까지 할 그런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자기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0-11-08 16:24   좋아요 0 | URL
양철북 출판사에서도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은 책들을 많이 내고 있더군요.그런 책들부터 읽어서 흥미를 가지게 하는 게 좋을 거예요.고전이니 명저니 해도 우선은 읽고 싶어야 하니까요.괜히 이름만 알려지고 읽기엔 거북한 책들을 강요해봤자 독서에 대한 흥미만 없앨 것입니다.

이번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으면 다눈치오를 인용한 장면이 눈에 팍 들어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