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고 있다. 기록으로 남기면 책을 읽을 당시의 마음까지 되짚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읽었다는 것밖에는 남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글을 남기면 어느 정도 분량의 기억까지 떠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 군데의 사이트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든 소리소문없이 사이트를 폐쇄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지금은 나보다 더 기억을 잘하는 스마트한 기계이지만, 사이트가 없어져버리면 그동안 누적된 나의 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사실 지금껏 유행하다가 시큰둥해지거나 없어져버린 사이트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정성껏 올렸던 글이 흔적조차 없어졌고, 한 시절의 열정도 함께 사라졌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내 기억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에 맡겨놓고 머리를 비웠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서평을 올리며 책에 대한 기억을 디지털에 저장해놓고, 사진을 찍어 놓고 여행의 기억은 하드디스크에서 잠자게 방치해두었다. 언제든 찾아볼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이 꽤나 많다. 이 책《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를 보며 나혼자만의 걱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애비 스미스 럼지. 문화사학자이자 디지털 콘텐츠 큐레이터이다. 모든 미디어에서 문화적 기록물을 생성, 보존,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디지털 보존, 온라인 교육,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의 역할, 디지털 시대의 지적 재산권, 새로운 정보 기술이 역사와 시간 개념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현재 디지털 콘텐츠 큐레이션, 지적 재산권, 디지털 경제에 대해 컨설팅하면서 여러 대학교와 미국과학재단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된다. 1장 '디지털 기록, 인간의 기억을 대체하다', 2장 '오직 인간만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이유', 3장 '왜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멀리했을까?', 4장 '신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인쇄술의 파고', 5장 '지식의 자유로운 공유를 허하라', 6장 '기억이 과학을 만났을 때', 7장 '살아 있는 과거들과 죽은 과거들 사이에서', 8장 '기억은 미래로 열린 상상력이다', 9장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의 생존법' 등 총 9장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정보 인플레이션이 언제 있었을까? 얼핏 월드와이드웹을 시작으로 인간은 정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와 같은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변곡점 네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메소포타미아의 글자 발달이고, 둘째는 고대 그리스의 도서관 발달이다. 셋째는 르네상스 시기에 일어난 그리스와 로마 문예의 부흥, 금속활자 발명이고, 넷째는 18세기 계몽 운동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정보 풍요의 경제 체제가 여기, 서구 사상사의 이 변곡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우리는 내적 기억을 보충해 주는 기억 보존 체계에 의존했다. 설형문자, 두루마리, 인쇄물의 지극히 단순한 이점 중 하나는 그런 매체에 새겨진 기억이 쉽게 변형되지 않고 겹쳐 써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내구성 좋은 도구들은 뇌와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물리적 형태만 잘 보존되면 종이 위에 담긴 글자와 이미지는 몇 번이나 읽혔든 수백 년 동안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면, 디지털 기억은 생물학적 기억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딱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쉽게 겹쳐 써지고, 일어난 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업데이트된다. 디지털 기억을 이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고정되고 안정적인 물리적 기억의 결정적인 이점을 한 가지 잃는다. 고정되고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로 정보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45쪽)

이 책을 보면서 디지털 기억의 약점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금껏 나의 기억보다 더 똑똑하게 기억한다고만 생각했는데, 0과 1로 기록된 데이터인 컴퓨터 암호는 인간의 기억보다도 불안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읽다보니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주제일 것이다.

 

"대단히 넓은 시야로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조망한다. 저자의 경고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면, 21세기 역사는 거대한 빈칸으로 침묵 속에 남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카(베스트셀러《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저자)

 

인류 집단 기억을 기록하는 부분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훑어본다. 인류의 기록 기술이 획기적인 발전을 맞을 때마다 어떻게 대처했는지 역사적 관점으로 짚어보고,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조망해본다.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단순히 현재의 문제만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파헤쳐보게 된다. 현재의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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