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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평점 :
쇼핑을 하는 데에는 흥미가 없다. 새로운 물건들이 가득한 곳에 가면 정신만 복잡해지고 기운이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구류는 다르다. 나는 문구류 쇼핑을 좋아했다. 기분 전환에 최고였다. 학창 시절에도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힘이 없을 때, 무언가 의욕적으로 새로 시작하고 싶을 때에도 문구류 쇼핑을 즐겼다. 과거형으로 쓰는 것은 현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손글씨를 쓰는 것보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익숙해지고, 그저 오래 전의 취미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도 꼭 그것만 고집하던 문구가 있었는데......이제는 사라져버린 문구류에 대한 기억을 이 책을 통해 되살린다. 기억만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문구류에 얽힌 역사를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은 과거의 시간을 끌어오는 책이다. 문구류에 대한 추억과 애착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책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그날 사용할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여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다음에야 일을 시작하곤 했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은 작가 생활 내내 완벽한 연필을 찾아다닌 끝에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지는' 블랙윙 602에 정착했다. 항상 작은 검정색 노트에 작품을 썼던 기행문학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그 노트의 생산이 곧 중단된다는 비보를 접하고는 평생 쓸 100권의 노트를 주문하러 나서기도 했다. 이들에게 문구는 평범한 소모품이 아니라 창작의 연료이자 작품의 일부였다. (책날개 中)
이 책을 약간 들뜬 마음으로 읽게 된 것은 처음에 담긴 글에서부터였다. 한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구들, 그 수첩이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그것만 고집하던 것, 볼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문구류가 있는 코너에 갔을 때에 설렜던 마음을 떠올린다. '이제 필요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여전히 내 공간에 함께 하고 내 시간을 알뜰하게 채워줄 수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이 책의 저자는 제임스 워드.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다. 런던 문구 클럽은 2009년 그와 일러스트 작가 에드 로스가 트위터에 #stationery 해시태그와 함께 문구 이야기를 올렸던 데서 시작됐다. 같은 책을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 모임처럼, 사람들이 직접 만나 문구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던 그는 이 해시태그 운동을 오프라인 문구류 품평회로 발전시켰고 런던 문구 클럽은 가장 완벽한 노트와 필기구의 조건에 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모임이 되었다. (책날개 中)
이 책을 읽으며 먼저 문구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미 추억이 되었나보다. 소박하고 겸손한 도구이자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담고 있는 물건.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책상 서랍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거나 회색빛 '사무용품'의 세계로 유배되는 것들. 나에게도 문구류는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필통에 넣어두고 아껴서 쓰던 로트링펜, 비싼 데다가 심이 부러지기 쉬워서 누군가 건드리면 얼마나 조마조마 했던가. 어느 순간 보니 내 곁에서 사라졌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은 이미 추억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 책으로 문구류 탐험의 시간을 보냈다. 클립, 만년필과 볼펜, 몰스킨 노트, 연필, 지우개, 형광펜, 포스트잇, 스테이플러 등 문구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최근 하나 장만하고 싶어서 달막달막 했던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펜' 이야기도 흥미롭다. 빅 크리스털 볼펜, 노란색 리걸 패드,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기념품펜, 테이프홀더 등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한 때 즐겨쓰던 것들에 대해서도 떠올린다. 잘 알고 있지만 잊고 있던 문구류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기분을 함께할 수 있는 책이다. 문구류에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문구류에 얽힌 역사와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있었다. 단순히 문구류의 역사만을 짚어본다고 생각했으면 이 책을 한달음에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구류에 관심이 있고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다가 멈추기 힘든 매력에 빠질 것이다. 일단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그에 얽힌 역사를 일러주기도 하고 관련된 다른 문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독자를 끌고가는 힘은 저자의 문구류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
볼펜 잉크 하나만 보더라도 일반 볼펜에 적합한 잉크, 롤러볼 펜에 적합한 잉크, 수성펜, 만년필에 적합한 잉크가 제각기 다르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우리 손에 조금 더 편리하고 조금 덜 부담스러운 필기구를 만들어주고, 그리하여 내 손의 일부처럼 익숙해져 평소에는 그 편리함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 그때야 비로소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363쪽)
옮긴이의 말에 나와있는 글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문구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상을 함께 하던 것들이지만 잊고 있었던 문구류가 이 책을 통해 의미 있게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문구류의 추억을 떠올리며 잘 알지 못했던 문구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