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서평을 쓰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감정의 여운이 오래 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손은 떨리고 가슴은 콱 막힌 듯 하다. 이런 기억은 몇 년 전에도 똑같았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이 책은『내 기억의 피아니시모』의 개정판이다. 처음 읽을 때에도, 다시 읽어도, 개정판으로 또 다시 읽어도, 가슴먹먹한 감동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반복된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린 환자의 입장에서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을 몰입해서 바라보게 된다.

 

앨리스 하울랜드 박사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의 저명한 교수로 심리언어학 분야에서 훌륭한 시금석을 마련한 뛰어난 경력의 소유자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편의 아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여성이 일상에서 자꾸 깜빡깜빡 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폐경기 증상으로 치부했다. 블랙베리를 어디 뒀는지 깜빡 잊고, 할 일을 메모해두고 그게 뭔지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늘 다니던 하버드 광장에서 길을 잃은 일이 조금 걱정스럽긴 했기에 병원에 가보았다. 의사가 방향 감각 상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할 때만 해도 설마했지만, 결과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가 점점 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갈수록 그 증가세는 피치 못할 결과일 것이다. 주변에서 치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주로 치매 환자의 수발을 드는 가족들의 모습이다. 이 책 『스틸 앨리스』에서는 치매 환자 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쩌면 이리도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나에 대한 의문은 옮긴이의 말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스틸 앨리스』는 하버드 대학 신경학 박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가 리사 제노바의 처녀작이다. 리사 제노바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신경학을 바탕으로 수년 간 알츠하이머병 질환의 증세와 진단, 치료, 환자, 보호자에 대해 연구하여 정확하고 명쾌한 알츠하이머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 소설은 앨리스 하울랜드라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2년 동안의 병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신을 앗아가는 병인 알츠하이머에 관한 작품으로는 유례없이 환자 자신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공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병의 희생자가 되기엔 너무도 젊은 쉰 살인데다 지성의 최고봉인 하버드 심리학 교수이기에 몹시도 비극적인 동시에 감동적이다. (413쪽_옮긴이의 말 中)

 

앨리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기에 그녀의 심리를 따라 읽어나가며 공감하게 된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밑바닥까지 쫓아가며 나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니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특별히 감성을 자극하거나 눈물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독자에게 억지 감동을 떠먹여주는 것보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스스로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는 생각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법도, 신발 끈을 묶거나 걷는 법도 잊게 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밀로이드의 축적으로 쾌락 신경이 파괴되어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을 즐길 수 없게 되리라.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차라리 암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츠하이머병을 암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리라. 앨리스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게 부끄럽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암이라면 적어도 싸울 상대가 있는 것이다.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 요법도 있다. 이길 수 있는 확률도 있다. 가족과 하버드 사람들도 용감한 투병에 응원을 보내며 그 과정을 고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암과의 싸움에서 패한다고 해도 그들 모두 알아보며 작별을 고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암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그걸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168쪽)

 

집에서 화장실에 가는 길을 잃는 장면, 현관문 바로 앞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고 묘사된 장면 등은 실제 치매 환자들의 입장에서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다. 약을 찾겠다고 온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나중에는 무엇을 찾겠다고 한지도 잊어버리는 장면,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장면을 보면 치매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족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상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족이고, 가족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기게 된다.

"넌 참 아름다워. 널 보면서도 네가 누군지 모를까 봐 두려워."

앨리스가 말했다.

"언젠가 엄마가 저를 몰라보게 된다고 해도 제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건 알 거 예요."

"너를 보면서도 네가 내 딸이란 것도 모르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도 모르면 어쩌지?"

"그럼 제가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엄만 제 말을 믿을 거고요."

앨리스는 마음이 놓였다. (323쪽)

 

앨리스의 임상 실험 약의 효과는 어땠는지, 병증의 진행은 어디까지 진행되는지, 이런 결과는 덮어두더라도, 과정 하나하나에 눈길이 가는 소설이다. 앨리스의 입장에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며,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들의 이야기를 계기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의 삶에는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나는 법이니, 한 번쯤 자신의 치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나도 친구에게 추천받은 책이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아닌, 자기자신의 입장에서 치매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꼭 한 번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면 치매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치매에 걸릴 수 있고, 상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당황할 수 있다. 소설을 매개로 한 번쯤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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