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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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인식하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 일상 속에서 보게 되는 사소한 것들,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이 그렇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감성을 빌어 재인식하게 되기도 하고, 내 마음의 창을 두드리며 불쑥 눈에 띈 돌멩이 하나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런면에서는 확실히 시인의 감성이 필요하다. 50만 독자가 선택한 『생각이 나서』의 작가, 황경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화가가 떨림의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내면, 작가는 화가의 그림이 주는 여운을 붙잡아 글로 지었다. 도서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는 화가와 작가가 함께 호흡을 맞추어 만든 에세이다. (책소개 中)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며 '좋다'는 감탄만을 할 때에는 그밖의 생각은 모두 날려버리게 된다.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많은 시간을 들여 사색에 잠기면 그냥 사라져버릴 감상들이 오롯이 살아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황경신 작가는 이인 화백의 그림을 자신만의 세계에 끌어들여서 글로 재탄생시켰다.

 

황경신 작가의 책은 『한입 코끼리』를 통해 만나보았다. 여덟 살 소녀가 보아뱀을 만나 열여덟편의 동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소설이었다. 내가 원하던 류의 책이었다. 이해하지 못했던 옛날 동화 속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기도 하고, 동화 속 문장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며 함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 책을 읽으며 나의 상상력이 여전히 빈약하다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내 안에 깊이 각인된 작가의 문장력이 이 책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를 읽어볼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이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이다. 작가처럼 사소한 상념을 붙들어 글로 표현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한참을 그림만 바라보기도 했고, 스쳐지나갈 법한 사소함을 잡아 끌어 글로 표현한 것에 시선을 고정시켜 보기도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침에 너는,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부스스한 영혼의 쓴맛을 훑는다. 밤새 무뎌진 과도로 사과를 깎고, 창을 열어 겨울을 받아들인다. 아침에 너는, 생의 가장자리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오래도록 소식이 없는 사람을 잠깐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쫓아낸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담아, 필터의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부어, 한 잔의 커피를 만든다. 아침에 너는, 세계의 엄격함에 절망하고, 더 이상 축소되거나 확대되지 않는 일상에 갇힌 기분을, 이를테면 답답하거나 안전한 기분을 점검한다. (29쪽)

 

인생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스쳐지나가는 소소한 일상이 인생을 채우는 소중한 의미임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애잔함이 있다. 타이밍의 어긋남으로 가물가물한 기억을 끌어올린다.

조그마한 소시지에 칼집을 내어 꼬마 문어를 만들면 소풍이야. 따뜻한 우유를 휘저어 거품을 내고 갓 뽑은 커피를 부은 다음에 계피가루를 뿌리면 소풍이야. 걸음을 멈추고 꽃봉오리 들여다보면 소풍이야. 꽃봉오리에 잠시 머물러 있던 노랑나비 팔랑팔랑 날아가면 소풍이야. (90쪽)

 

71편의 짧은 글들은 나의 아침을 깨우고 커피의 향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이 책과 함께 한 아침 시간이 나에게는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을 좀더 세심히 바라보고 싶은 의욕, 낯익은 일상 속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의욕, 좀더 깨어나는 시간이다. 이 책과 함께 한 4월의 어느 날 아침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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