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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황숙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월
평점 :
시간이 멈춘 듯한 곳, 한국인 듯 하면서도 한국이 아닌 곳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그들이 낯설었다. LA에 갔을 때의 느낌이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각 한 권의 소설책을 담은 듯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그곳에 가서 삶을 꾸려가면서 어찌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없었겠는가! 짧은 일정으로 방문했던 그곳은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만큼 쉽게 나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희미해진 그곳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이 책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그곳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잊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는 듯한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의 표지나 제목에서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내용을 담은 소설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올해에는 소설을 좀더 읽어보겠다는 나의 생각이 이 책을 읽어볼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맨 앞에 나와있는 작가의 말에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이어지면서 내 시선을 끌어들이는 힘을 느끼게 되었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허구의 살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소설을 읽고나서 남는 점이다. 사금을 채취할 때 모래가 흩어져버리고 결국에는 금이 남듯, 소설 속 이야기를 보면서 허구는 흩어지더라도 현재 살아가는 삶의 소리가 남는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문학이 아니라 기록이다. 하지만 논픽션은 아니다. 허구이다. 나처럼 조국을 떠나 부평초처럼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 중 불확실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살짝 보충한 허구이다. (작가의 말 中_5쪽)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은 모두 아홉 가지이다.
'미국인 거지, 산타모니카의 기러기, 내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 모네타, 어느 장거리 운전자의 외로움, 죽음에 이르는 경기, 호세 산체스의 운수 좋은 날, 거칠어진 손, 오래된 기억'
소설을 읽으며 뭉클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버거운 것이었나. 이런 모습의 삶도 있구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맨처음에 실린 「미국인 거지」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기에 끝까지 읽게 되었다. 전쟁의 기억과 현실에 상처투성이인 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또한 그의 대학시절과 청춘, 그리고 미국생활 초기의 체험이 제 7회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작인 「오래된 기억」과「거칠어진 손」에서 섬세하게 형상화되어 있다는 권성우 문학평론가의 발문을 보고 나서 그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 소설가들은 자신의 체험과 상상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기에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지난 시간을 유추해보는 것도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은 내가 LA를 생각하던 그만큼의 느낌이다. 나에게 동떨어진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직접 그곳에 갔을 때의 강렬한 느낌 그대로 나를 강타한다. 그곳에 갔을 때 만났던, 지금은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어떤 분들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던 그들은 그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으리라. 살아가는 이야기를 어디에라도 쏟아부어야 그 무게가 덜어지는 기분이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자신이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해야 현재를 버텨갈 힘이 생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작가 또한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보고 들은 이야기를 쏟아붓는 창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아홉 편의 소설로 묶여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소설이 나오리라 생각된다. 소재는 무궁무진하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