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디톨로지 (반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보며 거창한 이론을 우리 일상과 잘 연결시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잡다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 주변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주위를 환기시키고, 거기에 대한 문화심리학적인 해석이 곁들여지니,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거창하고 엄숙한 것을 집어던지고 잃어가고 있던 '나'의 존재를 나부터 인식하고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에 읽은 『남자의 물건』은 열 명의 남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의외의 물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와 『남자의 물건』은 제목이 도발적이다. '뭐?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고? 그런 말을 이렇게 대놓고 책 제목으로 써도 되는건가? 남자의 물건은? 설마 막바로 떠오르는 그 물건은 아니겠지?' 물론 그 책들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내와의 결혼을 가끔 후회하고, 남편과의 결혼을 가끔 만족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소소한 이야기였고, 남자의 물건은 말 그대로 물건이다. 아끼는 물건. 그런데 이번 책 제목은 생소하다. 도대체 에디톨로지가 뭐지? 오랜만에 보게 되는 작가의 이야기와 에디톨로지의 궁금증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에디톨로지! editology!' '창조는 곧 편집'이라는 의미다. 에디톨로지는 그저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하게 짜깁기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편집의 단위''편집의 차원'이 복잡하게 얽혀들어가는, 인식의 패러다임 구성 과정에 관한 설명이다. (프롤로그 中_7쪽)
작가의 입담에 빠져들며 읽어나가게 된다.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다. 심각하지 않고 농담도 던져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책은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라며 '공부는 데이터베이스 관리다'라고 강조하지만, 끝까지 읽고 싶은 책이고,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읽게 되니 말이다. 저자의 생각에 감탄하는 면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책이다. 지금껏 일상이 되어버린 생활 패턴을 조금 바꿔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책을 읽으며 순서대로 중요한 부분을 뽑아내는 정도에만 머물렀다면, 이제 좀더 데이터베이스화 하여 적재적소에 지식을 채워놓고, 필요한 때에 적절히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폭을 넓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손놓고 있던 붓도 들어보고 싶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천장 높은 공간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나에게 강력하게 다가온 첫 번째 이야기는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이다.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는 것, 그 생소함이란. 사소한 차이가 다른 문화를 형성하나보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사고의 폭을 다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왜 아무도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며 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을까? 남들과 다르면 불안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학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노트와 카드, 그 둘의 차이는 편집의 가능성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를 통해 바라본 원근법 이야기였다. 절대권력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쏙 들어온다. 권력은 원근법으로 공간을 편집한다는 논리가 왜 그렇게 큰 정원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해준다.
절대권력의 정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원근법적 원리까지 적용하여 자신의 성이 소실점의 정 반대편에 위치하도록 했다. 대칭과 균형의 정점에 자신의 시점을 위치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자기 권력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다. 흥미로운 것은 3차원을 2차원으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르네상스 원근법적 원리를, 절대권력은 3차원의 공간에 다시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163쪽)
세 번째는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세미나실의 책상 배치가 교육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다.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모두 일률적으로 앞만 바라보는 공간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국의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실의 공간 편집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교실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교사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202쪽)
요즘 그의 근황이 특이하다.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단기대학부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일본화를 전공한다고. 한 가지 일로 평생 끝나는 것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새로운 인생을 채워나가는 것이 그가 말하는 재미있는 삶의 모범답안이 아닐까? 그의 작품 <변태의 꿈 1,2> 앞에서 웃으면서 찍은 사진은 팬서비스인가보다. 재미있다. 이 책에는 강약이 있다.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즐겁게 풀어나가서 학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면이 모두 담겨있다. 그 점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