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하늘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을 넘길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이 소설을 읽어나갔다.

손암 정약전을 따라다니며 유배지에 함께 숨 쉬는 기분이 들었다.

《흑산도 하늘길》은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심리와 시대의 흐름이 절묘하게 맞물려 단숨에 마음을 잡아끄는 힘을 지녔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목선」으로 등단.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 큰 궤적을 남겼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가, 그림동화작가 한규호의 아버지이며 장흥 바닷가 해산토굴에서 집필중이다. (책날개 중에서)

흑산도에 가서 하늘길을 보았다.

그 섬에 갇혀 살다가, 그 섬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한 채 죽어 간 정약전 선생이 찾아낸 자유의 길은 하늘로 가는 길뿐이었다. 통곡하지 않고는 따라 밟아 갈 수 없는 그 길, 그 하늘길이 좋아 선생이 밟아 다닌 족적을 찾아 흑산도와 우이도(소흑산도)엘 부지런히 드나들고 그 참담한 갇힘과 슬프도록 아름다운 자유자재의 길을 동경한 결과가 이 소설이다. (4쪽)

흑산도 하늘길은 단절된 세상 속에서 새롭게 열린 통로이자 정약전의 내면을 비추는 은유적 공간이었다. 그가 육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바다를 넘어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흑산도라는 섬의 고립된 공간이 오히려 그의 사유의 폭을 넓히고 내면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내면이 확장될수록 그가 바라보는 하늘의 깊이와 넓이도 함께 커져가는 듯했다. 하늘길은 단지 물리적 경로가 아니라 정신적 해방과 깨달음의 상징이었고, 이 책을 읽으며 정약전과 함께 그 길 위를 걷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손암 정약전의 내면 묘사다. 유배라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였다. 흑산도의 자연은 그의 벗이자 적이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 갈매기의 울음소리, 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까지 묘사가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그곳에 서 있는 듯했다. 정약전의 시선으로 바라본 흑산도의 풍경은 그의 감정과 내면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아닌, 공존의 방식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흑산도에 정착한 이후 정약전이 어류의 생태를 연구하는 장면들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만하다. 물고기를 잡아 해부하고, 습성을 관찰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은 단지 학문적 연구를 넘어선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외로 다가왔다. 그가 기록한 '자산(현산)어보'의 탄생 과정이 이렇게도 생생히 그려질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고기 한 마리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 속에 깃든 탐구 정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약전의 인간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곁에는 그를 돕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흑산도의 어부들과의 교류가 흥미로웠다. 바다에 익숙한 어부들은 유배 온 선비인 정약전에게 지식인의 틀을 깨게 하는 인물들로 작용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대화들은 철학적이면서도 날것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정약전과 마을사람들의 소통은 신분을 뛰어넘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다. 정약전의 유배 생활은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가 그곳에서 체득한 깨달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소설의 전개는 흥미롭고 몰입감을 높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변화와 사건의 긴장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유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손암 정약전이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특히 흑산도에 갇혀 있던 '육지로의 그리움'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한편, 그는 유배지에서의 삶을 새롭게 구축해 나간다. '흑산도 하늘길'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육지로 이어지는 길이 끊어졌어도, 그 길을 하늘로 열고자 했던 정약전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단지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과 역사 속 인물들의 고뇌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신분의 억압, 유배라는 제도적 폭력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아를 잃지 않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또한 작가의 문장은 그 안에 묘한 시적 울림을 품고 있다. 흑산도의 바람, 파도, 빛, 그림자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소설 속에 스며들며 정약전의 내면을 투영하는 장면들이 많다. 바다의 끝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품는 그의 심정이 자연의 이미지와 겹쳐질 때, 그와 함께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의 세심한 문체 덕분에 정약전의 시선과 감각을 함께 느끼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묵직한 감정이 밀려왔다. 유배지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학문적 탐구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의 여정은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불과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