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을 걷는 시간 - 천년을 잠들어 있던 신라의 왕궁 소설가 김별아 경주 월성을 가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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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소라도 누가 가느냐가 이렇게 다르게 다가온다.

'경주 월성을 가다'라는 글 앞에 '소설가 김별아'라고 적혀있으니, '아, 이 책 읽어봐야겠다!'로 마음이 동한다.

그런데 월성이 어디지?

프롤로그에 보면,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첨성대와 불국사와 석굴암은 알아도 월성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학창 시절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도 없었고, 월성지는 실제로 천년이 넘도록 궁성의 흔적조차 없이 완벽한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호기심이 생겨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다.

베스트셀러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그 주요 무대였던 경주 월성을 걷고 느끼며 기록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책 『월성을 걷는 시간』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김별아.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조선 여성 3부작'으로 『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를 펴내는 등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으며, 원작을 복원한 '무삭제 개정판' 『미실』,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를 다룬 『탄실』, 조선 뒷골목의 살인 사건에 세밀한 상상을 더한 『구월의 살인』을 발표했다. 이외에 소설집과 산문집을 다수 출간했다. 2016년 의암주논개상, 2018년 허균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책날개 발췌)

이 책의 프롤로그는 박목월의 「사향가 思鄕歌」로 시작한다.

밤차를 타면

아침에 내린다.

아아 경주역.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

천년을

한가락 미소로 풀어버리고

이슬 자욱한 풀밭으로

맨발로 다니는

그 나라

백성. 고향사람들.

_박목월, 「사향가思鄕歌」 중에서 (프롤로그 4~5쪽)

목월의 시 「사향가」가 수록된 시집이 출간된 1959년 무렵에는 서울에서 경주까지 하룻밤을 새워 달리는 야간열차가 있었다는데, 밤기차로 꼬박 달려 새벽에 닿은 경주역은 어떤 풍경이었을지 궁금해하는 저자의 말에 나는 이제야 그곳을 궁금해한다.

첨성대, 석굴암, 불국사, 대릉원……. 수학여행지이거나 관광지로 만난 경주의 첫인상은 맥락 없이 나열되어 기억 속에 흩어져 있기 일쑤다. (8쪽)

나에게도 그랬다. 수학여행을 가서 여기저기 끌려다니듯 수동적으로 돌아다녀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곳을 '언제 한 번 다시 가야지' 생각했다가, 그 생각마저 잊고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책을 통해서 신라의 천년 왕성 월성을 이야기하니 무척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그리고 이 책은 프롤로그부터 천년 잠들어 있던 문화재 발굴하듯 조심스럽게, 비밀의 문을 열 듯이 두근거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된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된다. 프롤로그 '천년 왕성, 월성의 모든 시간'을 시작으로, 1장 '천년을 잠들어 있던 도시', 2장 '시간을 더듬어 만난 삶의 흔적_월성 안의 이야기', 3장 '신라, 무엇을 꿈꾸었던가_월성 밖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에필로그 '다시, 경주'로 마무리된다.

일러두기에 보면, 이 책은 2019년 《경북매일신문》에 연재되었던 칼럼 <월성을 걷는 시간>을 토대로 수정 보완하여 구성하였으며, 본문에 소개되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내용들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참고로 작성하였다고 언급한다.



신라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첫날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두 발로 월성을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불쑥 나타난 고분은 마총과 금관총을 포함한 노서리 고분군이었다. 거기서 길을 건너면 동남쪽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유명한 대릉원이 자리하고, 대릉원에서 길을 따라 가면 첨성대 그리고 계림이 나타난다.

이때부터는 발걸음을 늦추고 상상력의 보폭을 넓혀야 한다. 천 년 전, 천오백 년 전 그때의 사람들처럼 천진하게 혹은 위엄 있게 주위를 둘러본다. 월성 입구에서 3, 400미터 앞쯤에는 오뚝하고 어여쁜 첨성대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열고 있다. (22쪽)

아, 기억난다. 아니,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나도 걸으면서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경주에 가봤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희미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곳에 직접 가서 걷고 있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오히려 직접 가는 것보다 이 책으로 접한 것이 훨씬 실감 나게 다가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직접 가더라도 나에게는 안 보이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르니까.

특히 전혀 모르던 것이 아니라, 얼핏 알던 것들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느낌으로 읽어나가니 읽는 맛이 있다.

깊이 우려낸 육수 맛을 맛보는 듯, 그렇게 이 책을 음미하며 읽어나간다. 천천히 조금씩, 야금야금 읽어나가게 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낯선 월성이 한껏 가까워진다. 그저 월성이라는 이름이 왜 붙여진 것인지부터 하나씩 호기심을 채워간다.

월성은 말 그대로 성의 모양새가 초승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월성을 찍은 위성 사진을 보면 낫 같기도 하고 눈썹 같기도 한 초승달 모양새가 선명하다. (37쪽)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던가? 천년은 영화, 그리고 다시 천년은 폐허였다. 신라의 패망으로 더 이상 왕성일 수 없는 월성은 고려의 지배 하에 300여 년 동안 방치된 채 잊혔다. 한때 '황금의 나라'의 왕궁으로서 휘황했던 궁궐은 햇빛과 눈비와 바람과 이슬에 바래고 삭아갔다. 아니, 아무리 그렇대도 어쩌자고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졌단 말인가? (51쪽)

이 책은 월성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읽어나가게 된다. 옛 시인의 시와 사료를 통해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현재 그곳을 직접 가보고 세세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현재 그곳에서의 감정을 엿볼 수 있어서 현장감이 느껴진다.

월성은 반달을 닮은 터전 위에 지은 달의 궁궐이다. 풍류를 이야기하며 즐기기에는 쨍한 낮보다 어둑한 밤, 이글이글한 해보다는 은은한 달이 어울린다. 쌀쌀하지만 청량한 밤이다. 월성은 순량한 초식동물처럼 어둠 속에 나부죽하다. 발굴 조사 현장인 동시에 시민들의 산책로 역할을 하는 월성에는 LED등이 길을 따라 켜져 있어 천년 전의 횃불과 등롱을 대신하고 있다. (132쪽)



신라 그리고 경주와 서라벌의 중심이 바로 월성이다. 월성은 아직까지 다른 유물 유적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지금껏 파편적으로 이해했던 신라를 전체의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경주를 관통했던 동해남부선이 이설되고 동궁의 본래 범위가 확인되고 월성의 발굴 조사가 진행될수록 월성의 중요성도 그만큼 커질 테다. (265쪽)

월성의 최후에 대해서도 견훤이 불을 놓았다는 기록과 몽골 기병이 황룡사를 태웠다는 기록이 엇갈리며, 아무래도 신라 패망 후 방치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49쪽)는 것이다.

하지만 화재에 의해 일거에 사라진 것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니, 월성은 계속 발굴되며 현재보다 미래에 더 많은 모습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소설가 김별아가 천년 왕성 월성에서 걷고 느끼고 적어나간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월성이 생소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펼쳐들어 읽어나가기를 권한다. 지금껏 잠자고 있던 우리의 유산이 이제 막 깨어나는 느낌으로 생동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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