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르본 철학 수업 -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
전진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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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에펠탑이 보이고 커다란 가방을 멘 학생이 눈에 띈다. 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학생은 고정관념이라고 우기지 않는 한 여학생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이 전진. 물론 책날개에 보면 본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생판 남인 독자가 보기에도 떠오르는 다른 얼굴이 있어서 그런지 혼란스럽다. 책에 보면 '동양인 여학생'이라고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사실 이 책은 저자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파릇파릇한 느낌이랄까. 다듬어지거나 깨지지 않은, 닳고 닳지 않은, 그런 느낌을 전달해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아마 지금이기에, 이런 느낌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공부가 더해지고 나이가 들고 교수 정도의 위치로 올라가면 글에서 다른 느낌이 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학생은 왜 철학을 공부하나요?"

"긴 얘기가 될 텐데요."

프롤로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파리의 철학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책 《소르본 철학 수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전진. 파리의 철학도. 20세기 끝자락의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명품 인간이 되라!'는 교장 선생님의 외침에서 알 수 없는 수상함을 감지하고 스무 살이 되던 2015년, 모스크바를 경유해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 제1대학 철학과 학사를 마치고, 2020년 가을부터는 동대학원 철학과 미술사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더 많은 사람과 '철학하기'의 유익을 향유하며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삶이 무엇일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어 이 책을 썼다.

모범 답안도 아니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한 내 방법을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은 까닭이다. 삶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방법을 비교 대상으로 선보이는 작업은 《고백록》을 쓰던 루소의 다짐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고백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의 고백과 이어져' 있으니까. (7쪽)

이 책은 총 2장으로 구성된다. 1장 '배움의 시간: 나에게 가장 좋은 삶'과 2장 '배움의 재구성: 모두가 덜 불행한 세상'으로 나뉜다. 명품 인간이 되고 싶나요?, 내지 않은 휴학계, 낯선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법, 언어 학습자에게 보내는 편지, 돈 없으면 배움도 없다?, 좋은 삶을 공부로 배울 수 있나요?, 내게는 너무 서글펐던 집, 바뀐 이름을 걸고서, 건포도빵의 교훈, 하늘을 나는 철학과 과제, 도시 연애 수난기, 평범한 인종차별, 그녀는 왜 입꼬리 주사를 맞았나, 채식주의자의 파이 나누기, S#15 파리 13구의 슈아지 공원, 수치를 모르는 가난, 마초맨의 수난, 책에 관한 일곱 가지 짧은 이야기, 울기엔 좀 구린 슬픔, 걸려온 전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의 글에서 명품 인간이 되라는 교장선생님의 발언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이 "여러분, 명품 인간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고,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현기증 날 정도로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이다. 사람을 물건 취급 하다니! 하지만 그 교장선생님도 물건 취급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거나, 우리학교 졸업생들 최고가 되세요 같은 덕담이 아니었을까. 아마 사람들의 박수는 '와, 끝났다!'의 의미일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보면 어른이라고 완벽한 인간은 아닌 것인데, 고교 졸업 무렵에는 다르긴 하다. 누군가의 한 마디로 실망해버리거나 그 한 마디로 인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어쨌든 '명품 인간'이라는 것은 저자에게 화두처럼 다가와 파리행을 감행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경험담과 그에 대한 생각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에세이다. 프랑스 유학 생활을 하는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책 속의 글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특히 이런 것 말이다. '집을 구하려면 은행 계좌가 필요한데 은행 계좌를 만들려면 집 주소가 필요하다고? 프랑스, 나랑 싸우자는 건가? (77쪽)' 같은 것은 파리 유학생이라면 특히 공감할 것이다. 또한 크루아상이나 빵 오 쇼콜라가 아닌 빵 오 헤장을 고르는 취향이라니, 그 취향 존중합니다!

 



파리 제1대학 철학과 학사를 마친 지금 시점에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철학적 사고를 적절하게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드는 에세이다. 에세이는 다른 어떤 장르의 책보다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책이다. 소설이든 철학서든 다른 장르의 책은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들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에세이를 읽는 독자는 저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기본 전제로 읽어나간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말까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의 이야기부터 파리에서 좌충우돌 하나씩 삶을 채워가는 모습과 함께 철학적 사색까지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통통 튀지만 모나지는 않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의 80% 다크초콜릿 같은 에세이다. 저자의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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