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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리커버 에디션)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20년 3월
평점 :
이 책은 정여울 에세이『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리커버에디션이다. 그것만으로도 호기심을 극대화시켰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바깥 활동을 자제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이런 때에는 정여울의 에세이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여울의 에세이는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서 독서의 시간을 풍성하게 하기에 이 책도 기대되었다. 예전의 나 자신에게 지금의 내가 어떤 말을 들려줄지 생각해보며 이 책『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읽어보게 되었다.
30대는 내게 찬찬히 가르쳐주었다. 나이 들수록 책임이 커지는 것은 부담감만 커지는 게 아니라 능력, 관계, 인격, 나아가 내 인생의 울타리가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책임은 늘 무겁고 어려운 것이라고 두려워하던 내가, 지금은 더 많은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 삶을 꿈꾼다. 더 많은 책임이란 더 많은 사랑을, 더 깊은 우정을, 더 뜨거운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디 이 책이 '왜 인생이 이토록 풀리지 않는 것일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뜨거운 희망의 열쇠가 되기를. 이 책이 '우리의 30대는 왜 이토록 힘든 것일까'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외로울 때마다 주머니속의 다정한 벗이 되어주기를.
_11쪽, 프롤로그 中에서, 2017년 봄의 문턱에서, 정여울
흔들리는 삶의 순간마다 나를 지켜낸 것들에 대하여
어른인 척, 행복한 척하느라 외롭고 불안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책 뒷표지 中)
뒷표지의 문장부터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더니, 책을 펼쳐들자마자 보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이 나를 각성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삶에서 벗어나라."
_시몬 드 보부아르
처음부터 내 마음을 이끌고 간다. 기대하고 읽는 만큼 실망하지 않도록 문장들을 잘 다음어 담아낸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나이, 소개, 포기, 선택, 독립, 관계, 자존감, 소외, 상처, 걱정, 습관, 직업, 기다림, 생각, 우연, 순간, 이기심, 용기, 후회, 균형 등의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책에는 나이에 맞는 삶이란, 나의 가면이 나의 진심을 짓누를 때,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주저하고 망설이다 놓쳐버리는 것들, 마음속 화를 피하는 나만의 공간, 진정한 휴식은 감정의 무게를 줄이는 것, 삶을 사랑하는 자의 여행법, 시간의 흐름을 보는 시선을 바꾸자, 운명과 맞서 싸울 용기, 나는 후회중독자다, 지금이 '바닥'이라 느껴질 때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과『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통해 저자는 평론가에서 작가로 변신했다고 한다. 이 책들을 쓴 뒤 더이상 '내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도, 이 책도, 직접 읽어보니 작가로 자리잡을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키워드들에 대해 이 책을 읽으며 나또한 사색의 시간을 갖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정여울의 글은 마음의 여행을 하도록 안내깃발을 들고 이끌어주는 느낌이다. 여행 베테랑이 소중한 사람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패키지 여행같은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간다.
눈을 감고 귀 기울이는 음악, 한 시간씩 바라보게 하는 그림, 나른한 오후에 펼쳐 읽는 책 한 권, 하늘과 나무와 바다와 별들, 이 모두가 이 세상의 퍼즐을 맞춰가는 아름다운 '감상의 대상'들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미적 대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여유와 탐미적인 시선이야말로 '제 나이에 맞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정말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더 나아가 매순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더 나은 잣니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바로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갈 것이다. (23쪽)
책을 읽으며 한 줄 한 줄 마음에 보석 같은 문장들을 아로새기는 기쁨, 세상이 힘주어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가 직접 나서서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보는 기쁨. 이런 기쁨은 누구도 함부로 빼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요새 깊숙이 간직된 보물이 아닐까. 나는 매일 그 내면의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인 마음의 알곡들을 힘들 때마다, 배고플 때마다, 슬플 때마다 꺼내 먹으며 '내 안에 차오르는 힘'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 편안하게 배달해주는 수동적인 행복이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싹을 틔우고, 물을 주고, 마침내 열매를 캐내는 이 행복이 좋다. (248쪽)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문장들 앞에서는 저자의 표현력에 감탄한다. 어쩌면 독서의 기쁨을 표현할 때 자칫 식상하기 쉬운 듯한 감상일 수도 있는 저 느낌을 어찌 그렇게 착착 감기게 표현했을까.
정여울 작가의 글에는 정갈하게 걸러낸 정성어린 글맛이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고르고 깎고 다듬고 거르고 걸러서 한 권의 책에 담아낸 지극한 노력이 느껴진다. 그런 책을 읽을 때에는 뒤로 넘어가다가도 이내 앞으로 다시 돌아와 음미하곤 한다. 독자를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많이 마련해주는 책이다. 소중히 간직해두고 차분히 조금씩 꺼내읽고 싶은 에세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