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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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침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258쪽)

  ·······더 많은 것이 말해질수록, 우리는 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된다.(266쪽)


우울증으로 찾아온 중장년 엄마들의 경우, 거의 대개는 자녀들과 소통에서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해주는 조언의 핵심은 “아이들에게 진심어린 질문을 던지세요.”입니다. 참으로 알고 싶어 하는,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형태만 의문문이고 실제로는 억압적 청유, 심지어 지시일 경우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깔아놓고도 아이들 탓하는 부모가 아이들의 입을 닫게 합니다. 아이들을 침묵에서 해방하려면 부모의 진심을 공평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이치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두루 적용됩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이 침묵하는 이유는 여럿 있을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공격적인 고통 엄습할 때, 극도의 두려움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깊은 절망에 사로잡힐 때, 한사코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 참아 견뎌야 한다고 믿을 때, 그리고 공동체가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어떤 경우든 침묵의 대가는 고립입니다. 고통은 증폭됩니다. 침묵하는 본인은 그 침묵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침묵 자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됨은 물론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만들어냅니다. 그 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말하게 해야만 합니다.


더 많은 것이 말해질수록,·······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인간이 되어갑니다. 증폭되는 고통을 겪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침묵이 괴괴할수록, 그 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여타의 구성원이 의식하지 못할수록 공동체는 공동체성을 상실해갑니다. 대한민국 노인들이 침묵 속에 죽어갑니다(노인 자살률 OECD 1위). 저들이 침묵을 깨게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침묵 속에 죽어갑니다(청소년 자살률 OECD 1위). 저들을 침묵에서 해방해야 합니다. 세월호사건 유족이 침묵을 강요당한 채 더 큰 고통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갑니다. 저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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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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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귀감의 예를 필요로 한다. 자기 신화의 영웅적인 면모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데, 그것은 상처입음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257쪽)


찢어진 마음만큼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_메나헴 멘델


585번 찢어진 마음, "상처입음"으로 오늘이 여기 멈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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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말을 할 수 없었다.”·······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 때는 이다. 인간의 약함은 그와 같은 그 때는 이다. 분노했을 때·······, 목소리는 실패할 수 있다.·······윤리적 행동은··············그러한 실패를 회상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실패를 제공하면서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다.·······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위해·······분노를 사용한다.·······발견한 목소리는 기억에 대한·······책임을 충족시킨다.(255-256쪽)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후회 없는 삶을 살자, 하는 말이 이 맞는 말에 대한 맞는 응답일까요? 아닙니다. 후회라는 말은 오목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볼록한 표현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입니다. 후회 없는 삶은 깨달음 없는 삶입니다. 깨달음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 때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한 실패를 회상하고”서야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이제는 깨닫습니다. “인간의 약함은 그와 같은 그 때는”입니다. 인간의 강함은 타인에게 “그 실패를 제공하면서” 함께 공동체를 빚어 나아갈 ‘이제는’ 입니다. 공동체를 “발견한 목소리는 기억에 대한·······책임을 충족”시킵니다.


‘그 때는’ ‘이제는’ 사이가 너무 멀면 마음병을 얻습니다. 생각마다 행동마다 후회만 후렴처럼 따라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달음이 미루어진 이런 후회들은 자책감의 우물로 빠져 들어갑니다. 자책감의 우물 바닥에는 자기부정이란 괴물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자기부정의 괴물에 잡아먹힌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의 ‘그 때는’ ‘이제는’ 사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때는 실패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깨닫고 성공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데 깨달음이 계속 미루어지고만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더 미룰 수는 없습니다. 또 다시 어떤 식민지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매판독재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부정선거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제노사이드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역사 쿠데타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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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인 몸의 욕망은 생산적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이기를 추구하는 것, 존재의 한 방식으로서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것이 이 타자를 그 사람 자신의 우연성에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무엇이 그를 고통에 처하게 할 것인지는 자신의 자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만큼이나 우연적이다. 소통하는 몸은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체현된 우연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소통하는 몸은·······은혜를 공유하고자 한다.·······

  ·······은혜는 몸이 소통하는 몸으로서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이다. 이 은혜의 본질은 그것이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자아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246-248쪽)


작년쯤인가, 스포츠 계통 월드스타들한테 성공의 비결을 물은 데 대한 답변을 두고 누군가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타이거 우즈는 타고난 재능이란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고 노력만이 길이다, 라고 답했답니다. 김연아는 타고난 재능, 노력, 운을 모두 거론하면서, 특별한 길이 따로 있지 않다, 라고 답했답니다. 글쓴이는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라는 정치철학적 화두를 거론하면서 일반인들이 끌리는 우즈 식 발언의 매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김연아의 말이 더 이치에 맞고 진정성 있지 않느냐, 대략 이런 정도 내용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듯합니다. 기억을 되살리며 새삼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로 정곡을 찌르는 통찰이 담긴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운運을, 위 인용문에서는 우연과 은혜라는 두 말로 표현합니다.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을 인간적 관점에서 드러낸 우연은 운과 거의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좀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면 은총인데, 운과 우연에 비해 수직적 관계, 그러니까 하향성이 함축된 불가 예측·통제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서구, 특히 기독교적 어법일 것입니다. 만일 수평적 관계라면 적어도 드넓은 일방성이 듬뿍 담긴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셋 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생산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이 “생산적”인 결과의 본질은 시너지입니다. 시너지는 공동체적 진실을 지닙니다. 그 공동체적 진실은 구성원들이 “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을 “공유”함으로써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거두는 시너지는 총량이 있습니다. 많이 누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타인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감수성을 더 많이 키워야 합니다. 인간이려면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사회는 운도 자기 능력이라 우기는,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이 자기만의 능력에서 결과했다고 굳게 믿는 자들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명박 이후 두드러지게 이런 뻔뻔함이 사회 상층부에 미만해 있습니다. 저들의 정치는 우연성을 거부합니다. 자기 필연성을 고집합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감사 없이 요구만 합니다. 저들의 정치가 “생산적”일 리 없습니다. 소비적입니다. 기생적입니다. 수탈적입니다. 매판독재세력뿐 아니라 통칭 진보나 야당의 핵심에도 이런 자들이 준동합니다. 기회주의적 독선에 빠져 트로이 목마 짓만 거듭하고 있는 정상급 한 인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아를 공유하는 것”에 무관심한 난사람입니다.


우연과 은혜를 내팽개친, 그런, 난사람들이 시방 우리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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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 저 끝까지 내려갔다. 그 바닥은 단단하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통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바닥만이 단단하다는 것이다.(246쪽)


얼마 전 고등학생 하나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이른바 목동 맘이 키운 목동 키드입니다. 실은 몇 년 전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전교1등이었던 아이가 어느 순간 공부를 내려놓았습니다. 당연히 꼴등짜리 '쓰레기'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어머니는 폭력과 회유를 번갈아 행하며 도로 올라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사실은 그 목적을 위해 아이를 제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 번 상담하던 중 그 내용의 요약을 문서로 요구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의도에 부역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감으로 그 아이가 훗날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상담 첫날 나눈 대화 한 토막 때문입니다.


“너 지금 바닥인 거 맞니?”

“예.”

“다시 올라올 거니?”

“아뇨!”

“왜?”

“여기서 이전 나와 다른 나를 찾을 거예요.”

“그러면 됐다. 그 바닥이 네 ‘바닥’이다.”


분명히 바닥입니다. 하지만 도로 올라올 것이 아니라면 바닥이 아닙니다. 도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전 기준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다른데 어찌 꼭대기와 바닥이라는 수직관계가 있을 것입니까. 바닥은 그 바닥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것이기에 삶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차원을 바꾸는 “단단”한 “오직” 하나의 근거, 그것이 그 아이의 바닥이었습니다.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 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문태준의 <조춘早春> 전문입니다. 수직의 영역을 지녔던 그대가 오직 수평의 물, 그러니까 바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물의 유골인 나와도 결별입니다. 결별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 바닥입니다. 자기가 처한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결별 여부입니다. 결별은 깨침입니다. 깨침은 바닥에서만 일어납니다. 바닥에 닿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다시, 문태준입니다.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전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을 굽혀야만 합니다. 몸을 굽히지 않으면, 옛 자신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을 주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은 바닥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사코 높이 올라가려고만 하는 이 세상에서 몸을 굽혀 바닥에 닿으려는 것은 바보짓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보로 살라 가르치는 큰 스승 없으니 저 같은 무명의 의자라도 나서서 이리 주절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 꽃별들이 물 되어 바닥에 누워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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