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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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소개한 신문을 보았을 때 내용이 와락 궁금해졌다. 게다가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란 부제는 내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켰다. 그러던 차에 알라딘 서재의 나와같다면 님께서 고맙게도 선물해주셨다. 고마움이 더해져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책을 집어 들었다.


2. 책 앞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 정신분석학자가 선두에 서고 이어 라캉 관련 내용이 주르륵 흐른다. 그 순간,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를 멈춘다.


喝! 마음 단속하고, 찬찬히 첫 문장부터 읽기 시작한다. 서구 유학파 인문학자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들이닥치는 문장들에 아연 지적 긴장이 날을 세운다 싶더니 얼마 못 가 시들해지고 만다. 서구 유학파 인문학자들에게서 거의 대부분 나타나는 종자논리의 허술함이 단박에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3. 책을 관류하는 핵심 개념은 단연 슬픔이다. 슬픔을 마주하여 행하는 애도가 지니는 절대적 중요성은 췌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그런 애도를 허투루 대한다. 허투루 대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애도를 바르게 규정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상이한 두 맥락의 용법을 분별없이 버무리고 있다는 뜻이다.


저자가 처음 애도를 언급한 것은 플라톤이다. 그가 말하듯 “서구철학은 그렇게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절차로서 시작되었다.”는 그 애도다. 플라톤의 애도는 한 평생 계속되었고, 수천 년 동안 서구철학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수행되고 있다.


저자는 다음 맥락에서 이와는 다른 애도를 말한다. “슬픔의 종결”을 위한 애도다. 슬픔을 고정-관념 언어로 포획하여 병적 요소를 소진시키는 작업으로서 애도다. 이 애도는 상실이 가져온 공백을 다른 상념으로 메움으로써 병리적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방어적 자세”다. 여기서 실패하면 공백에 떠밀려 “슬픔의 편력”을 떠난다. 세월호 유가족이 바로 그렇게 편력을 떠났다 한다.


저자의 이 논의는 매우 성기고 무책임해 보인다. 우선 여기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애도와 앞의 플라톤의 애도가 같은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같다고 해도, 다르다고 해도 논리가 흐트러진다. 무엇보다 나중의 애도는 그 자체로 분명히 병리적 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이를 맥락 정리 없이 세월호 가족에게 적용한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애도는 슬픔에 감응response하는 행위다.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방어적 자세로서 애도는 슬픔에 반응reaction하는 행위다.


반응으로서 애도는 격정emotionalism 슬픔의 프레임에 갇힌 것이다. 그 애도는 슬픔을 결코 종결하지 못한다. 고정-관념 언어로 포획하든 다른 상념으로 메우든 슬픔은 소진되지 않는다. 아니 더 근원적으로, 진정한 애도는 당최 슬픔의 종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진정한 애도는 슬픔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격정의 프레임을 벗어난 슬픔이 건네준 깨달음을 통해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능동적 각성 행위다. 이 능동적 각성이 바로 슬픔이 빚어내는 혁명의 인프라다.


세월호 가족은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방어적 자세로서 애도를 시도한 적 없다. 당연히 실패한 적도 없다.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권력이 그런 애도를 강요했고 가족은 그것을 거절했다. 권력이 실패했다. 전체 문맥이 이런 사실을 전달해주긴 하지만 저자의 어정뜬 애도 개념은 끝내 독자로 하여금 애도를 오해하게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만지지 말라”, 곧 “애도하지 말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애도 개념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진리는 언제나 애도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본디 슬픔은 요청의 대상이 아니다. 요청의 대상이 되는 ‘슬픔’이 바로 애도다. 애도의 빛을 통과하기 전의 슬픔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슬픔을 빛일 수 있게 하는 애도로써 슬픔은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리로 구현된다. 슬픔이 아픔의 자리이자 깨침의 자리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애도로 말미암는다.


슬픔에서 발생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철학이라 할 때, 철학은 애도 그 자체다. 구태여 말하자면 애도는 슬픔의 ‘슬픔’이다. 깨달은 ‘슬픔’이다. 거듭난 ‘슬픔’이다. 대승의 ‘슬픔’이다. 혁명의 ‘슬픔’이다. 철학은 슬퍼하지 않는다. 철학은 애도한다.


4. 촛불의 애도 혁명이 시작되어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권력의 외형은 붕괴되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의 거대한 힘에 결정적·근본적 균열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애도에 다시없이 구체적이고 옹골찬 디테일을 더해야 한다. 푹신한 성실을 깔아야 한다. 질기디질긴 승부욕을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 다음번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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