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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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으로 지어진 고층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천 년의 기술 발전을 이룬 뒤 이런 추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고 화난다.(463쪽)


생명이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대상의 본질에 닿아 있으며, 기능의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기능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다른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465-466쪽)


  따라서 영혼이 담긴 물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물건을 만들려면, 생명력·자기지향·인간성을 투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467-468쪽)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0년째 살던 어느 날, ‘낯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온 것이 1965년이다. 시내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들이닥치는 문화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건물의 높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2층 이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골 소년에게 그 높은 건물은 ‘아름다움’ 자체였다.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내게 서울의 고층건물은 동경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어느 순간 서울을 몸처럼 느끼기 시작하면서 내게는 다른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높은 건물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심지어 아파왔다. 산동네 작은 집과 골목이 폐허로 변할 즈음 나는 쫓겨났고 얼마 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서슬에 민초의 애환과 사연을 품은 소소한 풍경은 무참히 스러져갔다. 변두리 대로변조차 빌딩 숲으로 바뀌었으니 종로나 명동 일대는 말할 나위가 있으랴. 무교동 낙지집, 청진동 해장국집, 피맛골 생선구이집, 명동 막걸리집도 죄다 사라지고, 어느 평론가의 표현처럼 ‘고층 폐허’만이 우글대는 세상이 와버렸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저절로 이런 정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고층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천 년의 기술 발전을 이룬 뒤 이런 추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고 화난다.


고층 폐허는 추할 뿐 아니라 비인간적이다. 위압감만으로도 웬만한 사람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불의하기까지 하다. 부자들이 비겁한 축재 수단으로 써먹는 전가의 보도기 때문이다. 이것에 누가 “생명력·자기지향·인간성을 투여”하겠나. 이것을 누가 “자신을 담아 만들어”내겠나. 이것에서 누가 “대상의 본질에 닿아”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겠나.


신성 유물론은 인간이 빚는 물건을 사물화하지 않는다. 그 물건은 자기 자신의 연속이다. 그것에 자신이 배어든다. 신비주의가 아니다. 신성하게 예우하는 결곡한 삶의 기조다. 신성 유물론은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신을 삼가 가만가만 만지는 이야기다. 더 고매한, 더 심오한, 더 광활한 이야기는 허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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