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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즐, 삶을 요리하다 - 슬로푸드를 찾아 떠난 유럽 미식기행
노민영 지음 / 리스컴 / 2010년 10월
절판
통계학을 전공한 저자가 미식에 매료가 되어 국제 슬로푸드협회에서 설립한 미식과학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자연을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끌며 사라져가는 다양한 음식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바로 슬로푸드 운동이다. 4p 그녀는 슬로푸드 운동의 핵심을 고수하는 신개념 미식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유럽, 그 중에서도 그녀가 공부한 이탈리아의 슬로푸드와 스페인, 그리스, 프랑스의 슬로푸드에 대한 많은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배운 요리와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소중한 맛집들이 수록된 책이다.
언젠가부터 내 이야기의 주된 소재가 음식이 되어버렸다. 맛집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높아지고, 다녀 온 후의 평가라던지 소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할땐 그 사실을 몰랐는데, 가족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아버지의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먹는 얘기 빼고 하는 이야기가 없냐" 하며 핀잔을 주셔서, 아, 내가 너무 먹는 이야기만 했나? 하는 반성이 들 정도였다. 그녀가 쓴 이 책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음식을 중시하고, 실제 식탁에서도 음식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등장한다는 것을 들으며 사실 내가 받은 핀잔이 그 나라에 가면 당연한 화제였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도 들었다.
할머니 세대부터 내려온 요리법과 어떤 와인이 좋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평범한 소재일 수 있다. 하지만 맛의 즐거움이라는 슬로푸드의 궁극적 지향점이 얼마나 이탈리아의 생활 속에 묻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94p
한국에서도 요즘 흔하게 팔리고 있는 젤라토 아이스크림 전문점. 나는 그 젤라토라는 이름이 젤리처럼 끈적끈적하고 농축된 느낌이라는 뜻인줄로만 알았는데..
이탈리아어로 '젤라토'는 '얼은'이라는 뜻이다. 53p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 엉성한 생각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인들의 젤라토 사랑은 감히 아이스크림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만드는 온도도 다르고, 질감, 식감까지 다른 젤라토. 내가 생각한 끈적끈적한 고농축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젤라토는 좋은 원료로 최고의 맛을 지향하는 그들만의 소중한 음식이었던 것. 씨즐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저자의 안내를 통해 젤라토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되어 고맙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많은 숨은 맛집들을 발로 뛰며 발굴해서 소개해주는 고마운 정보까지.. 어디를 가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현지의 맛집이 최고라는 그녀의 지론이 나의 맛집에 대한 지론과 일치하는 터라, 이탈리아에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녀의 조언대로 찾아가고픈 맛집들이 제법 많이 챙겨진 느낌이었다.
8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이탈리아는 토마토가 한창이다. 이맘때면 이탈리아 가정은 연중행사로 토마토 소스를 만들며 막바지여름을 마무리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년에 한번, 한해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듯, 이탈리아에서도 다음 여름까지 먹을 토마토 소스를 담는다. 103p 우리나라 마트에도 흔하게 들어와 있는 토마토 소스들, 미국이나 기타 다른 나라에서도 삶은 파스타 면에 병에 든 소스를 부어 휘리릭 끓이는 간편한 파스타가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치를 사먹는 가정이 늘듯이 이탈리아에서도 병 소스를 간편하게 사서 먹는 집들이 늘고 있는 추세라던데, 저자는 다행히 친구 맥스네 집에 초대되어 그들의 토마토 소스 담그는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였다. 아, 김장과 같은 문화였다니 정말 새롭고 놀라웠다. 1년치 토마토 소스라.. 80kg 정도의 토마토를 공수해와서 (우리나라에서도 배추를 몇십포기씩 사다가 담그는 것처럼) 다듬어 끓이고 분쇄기로 갈아서 약간의 간을 하는 것. 그리고 병에 넣고 삶아서 살균처리하는 것이 토마토 소스 만들기 끝.
김장 담그는 날 겉절이에 밥 한그릇 뚝딱 하듯, 그들도 새로 만든 토마토 소스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하였다.
씨즐의 비밀 레시피라고 해서, 그녀가 배운 정보뿐 아니라 소중한 에세이들에 어울릴 법한 귀한 요리법들을 공개한 레시피도 돋보였다. 토마토 소스 만드는날엔 맥스엄마께 배워온 사프란 리조토 레시피를 공개해주었다. 또한 마요네즈보다 훨씬 맛있는 알리올리 소스에 감자튀김을 찍어먹을 수 있게 레시피를 올려준것도 인상적이었다. 마늘로 만든 소스, 꼭 한번 나도 해보고 싶은 기대되는 맛이었달까?
재료의 산지를 직접 방문해보고, 만들어지는 과정서부터 완제품으로 시식을 하기까지의 과정까지.. 그녀가 소개해주는 모든 치즈, 살라미, 하몽 등의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정보들은 생소하기도 하고 인상적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소개해준 재료 중에 내가 먹어본 것은 다 대량으로 생산된 기계가 만들어낸 대중화된 식재료들이라 그녀의 평가는 절하되어 있는 그런 제품들이었다. 바릴라 스파게티 면이라던지, 크래프트사의 파마산 치즈라던지..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만든 파르미자노 레자노와는 전혀 맛이 다른 저렴한 가격과 저렴한 맛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그런 것들.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그들의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먹어보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파마산 치즈로 간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처럼 올리브 오일에 버무린 파스타를 오늘 산 치즈 덩어리(파르미자노 레자노)를 갈아 솔솔 뿌려낸 초간단 스파게티는 정말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최고의 식재료가 만들어내는 단순하고 명확한 맛. 그 맛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패스트 푸드에 길들여진 입맛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슬로 푸드하면 보편적으로 떠오른 집에서 만드는 우리나라 가정식의 모든 것들. 하지만, 그녀를 통해 서구의 슬로푸드에 대해 새로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만든 그 음식들을 나도 한번 먹어보고싶단 생각이 들었다. 대량생산된 재료가 아닌 자연에 가까운, 그리고 자연을 존중해 만들어진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