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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전혜린 - 그리고 다시 찾아온 광기와 열정의 이름, 개정판
정도상 지음 / 두리미디어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나를 한때 천재라고 불렀다. 남학생들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대 법대에 당당하게 합격했을 때부터 붙은 칭호였다. 나는 서울대 법대에 단 한 명 밖에 없는 여학생이었다. 공부라면 자신만만했다.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천재는 바보처럼 무모해야만했다. 자신과 세계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고 모든 불가능의 벽을 억척스럽게 넘고 자유로운 상상과 심연보다 깊은 사색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이 천재였다. 다른 사람이 창조한 글이나 사물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사람이나 남들보다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다고 해서 천재인것은 분명 아니었다.
천재가 위대한 것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있다고 나는 믿었다. 223P
자신이 쓴 소설 속 여주인공과 꼭 닮았던 여인 전혜린. 그녀는 정말 1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은 당대의 문인이었다. 서울대 법대의 유일한 여학생이었을뿐 아니라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20대에 이미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놓은 번역작품들은 모두 뛰어난 문체의 작품으로 칭송을 받았고, 그녀가 내놓은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많은 사람의 호평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대학에 다닐때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이름 석자,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이력때문에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 한동안 소름이 끼치듯 전율이 오는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곧 그렇게 20대와 함께 그녀는 내 기억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30대가 되어 다시 만난 전혜린. 그녀는 정도상 작가의 오마주로 다시 태어났다. 책의 표지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섬뜩하게..목이 없는.. 아니 목이 안 보이는 여인의 모습으로 섬뜩하게 바닷가에 서 있는 표지였다.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 무서운 표지에 망설여졌지만, 너무나 궁금한 그녀의 베일에 쌓인 이야기에 나는 무서움을 참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은 그녀가 쓴 소설이 액자식으로 끼워져있는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주영채. 소설 속 그녀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그녀의 삶과 어느 부분이 다를까 싶을 정도로 닮아있던 그녀. 주희라는 절친한 친구 대신 잔느라는 또다른 친구가 창조되었지만 어쨌거나 소설 속에서 액자식 소설 속에서 그녀와 주영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잔느의 편지 한 통이 던진 파문이 이토록 대단한 줄은 몰랐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 알제리의 문제로 시위를 하는 뮌헨대학의 학생들을 보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대다수의 유학생들은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고 구경만 하는 정도였다. 자유를 추구하던 내 양심은 격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117P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그녀. 부유하고 똑똑하게 살아왔지만 그녀의 삶은 아버지의 친일을 바탕으로 유지된 삶이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 입학에서부터 결혼까지 모두 아버지가 정해놓은 각본대로 정해진 인생을 따라가야했다. 똑똑하고 정신세계가 높은 그녀였을 지라도 그녀에게 주체적인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교육에 있어 조금 더 기대치가 열리고 남성처럼 동등한 교육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 외에 그녀는 봉건적인 다른 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순응을 해야했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 슈바빙에서 만난 자유로운 영혼들을 보며 그녀는 부러움과 충격을 동시에 받는다.
"존재에 앓고 있다."
혜린은 이 말을 자주 했다. 이 말의 깊은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을 병에 걸려 일주일 넘게 어두운 방안에서 끙끙 앓아야 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다. 정신적인 허영이나 사치로 치부하고 말았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홍역을 치르듯이 혜린은 일년에 한번씩 정신의 홍역을 무섭게 치렀다. 그래도 이번에 치러낸 홍역은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 무섭도록 허탈한 상태에서 소설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이만큼 흘러왔다. 154P
그녀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을때는 그녀가 이해되지가 않았다. 너무 똑똑한 천재였기에 외로웠던 걸까? 아버지의강압까지는 알지 못했어도 아이가 있는 그녀가 자살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나였다. 그녀의 삶을 알고 나서..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존중받기를 원했던 그녀였기에 영혼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강제적인 결혼은 힘든 삶의 연속일 수 밖에 없었을 터였다.
정도상 작가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으며 자꾸만 주저하는 멈칫거림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 책을 읽을 수록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전혜린이라는 이름 석자를 다시 떠올리며 그녀의 슬픈 젊음 속으로 그 시대가 갖고 있는 한계때문에, 채 꽃피우지 못한 그녀의 아쉬운 젊음 속으로 우리를 안내해주는 소중한 기록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