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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의 집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시작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기시 유스케. 그의 작품 중에서는 크림슨의 미궁만 읽어보았지만, 검은 집을 비롯하여 유리망치 등 다양한 유명 작품들로 이미 한국에도 많은 팬층을 형성한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그가 4년만에 내놓은 이번 작품은 네 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으로 '완벽한 밀실을 무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의 진상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밀실 미스터리라.. 기존에도 밀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는데, 그저 사방이 막힌 탈출구 없는 그런 밀실을 대상으로 어떤 추리를 하고, 범죄 이야기를 엮어 간다는 건지 평범한 나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소 어두운 표지, 새장안에 갇힌 양복을 입은 듯한 남자의 절규가 들리는 듯한 몸짓.
으스스한 표지를 보고 두려움부터 일었다. 예전에는 무서워하면서도 공포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나, 몇년전부터 무서운 거라면 우선은 아예 보지도 읽지도 않겠단 마음이 들 정도로 겁이 많아져 버렸기에 표지만 보고서도, 예전의 그의 작품이 생각나 겁이 나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책을 읽기도 전에 지인들의 서평을 읽어보니, 기시 유스케 답지 않게 공포스럽지 않았다라는 글을 읽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는데..
그나저나 지은 지 100년쯤 되는 일본식 가옥에 왜 그리움보다 음침함이 느껴지는 것일까?
현대식 건축에 비해 채광이 좋지않아서 음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이집에는 그것말고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대체 왜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 것일까? 가상이나 풍수지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당치도 않은 금기를 어긴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31p
아빠가 집에 돌아오자, 집에 있어야 할 딸 아이의 인사가 들리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다 차갑게 식어 있는 딸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큰 충격을 받는다. 경찰이 와보니, 집 밖에는 과수원 일을 하며 내내 집을 주시한 마을 아낙이 있었고,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으로 들어서거나 나가는 사람 모두 없었다 하니 북쪽으로 열린 창문만이 사건의 실마리가 될 것인가. 북쪽 창문 밑에는 도망간 발자국이 남아있지 않아 범인이 어디로 증발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밀실 미스터리"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람은 죽었는데, 범인은 증발해버렸다.
그리하여 등장한 변호사 준코와 범죄자 출신으로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게 추리를 해내는 밀실 미스터리 전문가 케이까지.. 이 둘의 등장은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유리망치>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변호사와 좀도둑 케이의 콤비가 다시 펼쳐진 소설이 바로 이 도깨비불의 집인 것이다. 나로썬 처음 만나는 그들이었지만, 유리망치를 읽어본 이들의 리뷰에는 그들과의 재회를 꽤나 반기는 눈치가 엿보였다.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밀실 트릭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케이,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재치있게 응수할 줄도 아는 준코. 도깨비불이라는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음산하게 전해져오는 그 집안의 분위기가 나까지 침울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두 남녀가 풀어나가는 사건의 실마리는 꼭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아도 추리소설이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적 유희라는 표현에 걸맞게 잘 짜여진 트릭과 잘 풀어지는 해법이랄까. 어쩐지 그들만 있으면 이 세상의 밀실이란 더 이상 밀실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믿음.
"자, 잠시만요. 대체 고타는 무엇때문에 흉기를 봉투에 넣어서 창문으로 던진 거죠?"
"아아, 고맙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종이컵을 받고 말을 이었다.
"흉기가 금괴였기 때문이지요."
82p
사건을 알면 알수록 갑자기 금괴같은 둔기로 얻어맞는 것 같은 둔탁한 충격도 받게 되고..
도저히 범인이 누군지 알기 힘든 그때에 스물스물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끝이 났을 적에는 ..아..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다 읽고 나서 다시 곱씹고, 또 떠올려볼수록.. 아찔하게 느껴지는 상황들이었다. 어째서 그랬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그럴 수 없었을 텐데..음산한 집의 기운이 살인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일까.
공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이었지만, 준코와 케이를 따라 범인을 예상하며 추리해가는 과정은 충분히 즐거운 과정이었다. 도깨비 불의 집을 비롯하여, 검은 이빨, 장기판의 미궁, 개는 알고 있다 까지.. 우리의..아니 어쩌면 나만의 예상을 살짝 웃어주기라도 하듯 빗겨가면서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어거지로 맞춰진 틀이 아닌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맞아들어가는 시나리오에 사실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검은 이빨의 경우에는 작가처럼 고양이나 강아지를 예상하고 있던 애완동물이 발톱과 이빨이 새카만 녀석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도대체 그렇게 무서운 동물이 어디 있는 거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부터 그게 무엇이라는 이야기없이 소소한 공포감으로 몰아가는 작가의 세심한 배려. 정말 세상에서 다시 못 볼 기괴한 괴물이 나오는 줄 알았단 말이다. 애완동물에게 물려 죽은 남자의 일을 파헤치게 된 (원래는 동물 사육에 의한 사망으로 생각했으나 사건 정황상 살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준코의 멋진 마무리 이야기.
장기판의 미궁에서는 그저 어릴적에 잠깐 재미로만 뒀던 장기의 프로 세계에 얽힌 이야기와 또 그와 관련된 살인사건을 푸는 밀실 이야기가 나오고.. 개는 알고 있다는 다소 아쉽게 끝나버린 해프닝인양 살인사건임에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그런 정말 가벼운 밀실 이야기였다.
이중에서 나는 도깨비불의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가장 긴 중편이자, 소설의 제목을 차지할만큼 비중이 큰 작품이었고, 또 그에 합당하게 더 꼼꼼한 작가의 트릭이 등장한 것 같았다. 아니, 트릭이라면 검은 이빨이 좀더 강력하려나? 어쨌거나 끝까지 반전을 거듭하던 도깨비 불의 집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걸 보면..한동안은 밀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