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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ㅣ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절대로 나를 보지 않을 것, 그게 유일한 조건이에요. 48p
당대 최고의 화가인 피암보는 어느날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가 받은 그 어떤 급여를 모두 합친것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제안하며,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단, 절대 그녀를 보아서는 안되고, 다만 그녀에게 외모 외의 질문을 던지며, 그녀를 상상해서 그리되 꼭 그녀와 닮게 그려야 한다는 황상한 제안이었다. 실물과 다른 초상화들, 의뢰인의 입맛에 맞게 각색하듯, 새로이 창조된 초상화를 그려주던 피암보는 예술적 한계에 부딪힌 평범한 날들에 좌절하다가, 묘한 제안을 받고 망설이던 끝에 수락하게 되었다.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그녀.
병풍 뒤에 숨어서 그가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어릴적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그녀의 일생.
점성술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 아버지의 직업은 눈의 결정을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그런 일들이 그녀 주위에 일어났고, 그녀 또한 쌍둥이 눈 결정체의 힘으로 무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병풍 뒤에서 다른 사람의 질문에 미래를 보며 점을 칠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는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묘연하기만 한 그녀.
이야기만으로 인물을 형상화한다는게 가능한 일일까?
나 또한 그런 엄청난 액수의 제안을 받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소설이기에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이런 악마의 유혹같은 제안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게다가 뛰어난 실력을 가진 화가라면 본인의 한계와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또다른 욕구로 그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겠다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제야 나는 내 성적 욕구가,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터무니 없는 기대가 샤르부크 부인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진짜 샤르부크 부인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환상의 여인을,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을 그리게 될 터였다.
"명심해라. 피암보, 초상화란 어느 정도 그리는 사람의 자화상이란다. 모든 자화상이 초상화인것처럼 말이다."112p
병풍 뒤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라는 샤르부크 부인의 황당한 제안에 미친듯이 고민하던 피암보는 그가 상상한 숱한 여인들이 모두 그가 생각한 최고의 미인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마도 그런 황당한 제안을 자신있게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게 아닐까도 싶었고.. 남성들의 미녀에 대한 일반적인 환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떻게든 실마리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의 과거에 관련된 사람들을 수소문해보기도 하지만, 그녀가 말한 황당한 이야기들이 진실임을 입증해준 그런 이야기들일뿐. 어릴 적 그녀 모습을 그저 병풍뒤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야길 듣기도 하였다. 게다가 병풍 뒤에만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심지어 피암보의 뒷조사까지 직접 다니기까지 했다. 내가 스쳐지나가는 여인 중에서도 내가 간과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샤르부크 부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를 심하게 옥죄어 오는 작품에 대한 갈망.
나는 여자로서 엄청난 힘을 얻었어요. 외모는 비밀에 싸여있지만 남성들이 원하는 힘, 즉 그들의 운명과 미래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나는 내 외적 형상과 내적 자아가 서로 동등하게, 하나로 받아들여질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393p
병풍 뒤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말을 한 샤르부크 부인.
피암보는 그녀의 꼭두각시가 된 느낌을 지울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과감히 그녀의 작품을 포기하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피암보는 과연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화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 보지도 않고 그녀를 그려낸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나름대로 많은 구상 끝에 그림을 그려나가려고 하는 찰나마다 수시로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샤르부크. 바로 그녀의 남편까지도 그녀 이야기 속에서는 죽은 사람이었다.
눈의 결정이 예언하는 미래의 일과 똥 속에서 얻어진 결과물이 예언한 것이 일치하는 무서운 점지력이 보이기도 하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 도시가 점점 공포에 쌓이기도 한다.
처음엔 거액의 돈에 대한 집착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갈수록 그를 힘들게도 만들었다가 결국엔 완성시키겠단 강한 의지로 귀결되게 만드는데..
기묘하고 두렵지만, 마냥 무섭지만은 않으면서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멋드러진 소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