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나 소설
김규나 지음 / 뿔(웅진)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놓친채 읽어내려가기도 한다. 바로 그 소설이 단편인지 장편인지도 생각지 않고, 그저 맞닥뜨리듯 읽다가, 어? 단편이었네? 이렇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인지라 그 의외의 놀라움이 기쁨이나 아쉬움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단편 소설을 장편 소설 못지 않게 좋아하는 터라, 이 책 역시 짬짬이 쉬어 가며 읽을 수 있어서 더욱 좋다고 생각을 하였다. 게다가 한편 한편의 작품이 모두 수준급이어서 이 책이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만이 소리를 낸다.
하지만 팽팽함은 언제 끊어질 지 모를 불안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당신은 아내가 행복한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울이 끝나 가면서 발 밑에서 살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18.19p 칼
 
설마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여러 책을 읽다보면 어떤 책은 아, 너무 쉽게 쓰여진 책 아닐까? 싶은 아쉬움이 들때도 있다. 그냥 허투로 결말을 내어버린다거나, 그냥 중언부언 말을 흐려 버리는 그런 글을 만날때의 난감함이랄까?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정말 공들여 썼다는 느낌. 그리고 작가의 내면의 깊이가 느껴진다는 그런 느낌이 진하게 배는 그런 책이었다. 띠지에 나왔듯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윤후명, 서영은님이 "흔들림 없는 문장 속에 등장한 부검의의 존재, 섬세한 묘사, 죽은 당신을 통해 발라낸 우리들의 실존, 여태껏 등단 않고 어떻게 있었을까? 라고 말했듯. 정말 어디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신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칼날에 부딪혀 여자의 눈을 찔렀다.
 여자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 몸을 떨었다.
115p 코카스칵티를 위한 프롤로그
 
탄탄한 문장력, 그리고 유려한 글 솜씨.
책을 읽다가 좋은 표현이 나오면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살짝 책을 접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게 접힌 부분이 무척이나 많았고, 각 단편들마다 거의 매번 그런 접힌 부분들이 나오곤 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볼때마다 글을 쓴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바다에서 갓 건져 올려 파닥이는 은빛 갈치처럼.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상처 난 영혼이 느껴져 나는 소름끼쳤다. 헤어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사랑이란 반드시 간격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더이상 다가갈 빈 공간이 없다는 것은. 너무 먼 단과 나처럼 대화도 섹스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먼 사이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너무 멀어서. 혹은 너무 가까워서 사랑은 가끔 참을 수 없이 슬프다.
153p 거울의 방
 
단순히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만도 나는 이렇게 어렵단 생각이 들고, 뭔가 흡족하지 않은 표현들에 아쉬움이 가득하기만 한데.. 김규나 작가의 표현들을 보면, 정말 딱 떨어지는 그런 표현들이 너무나 많다.
 
실체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두려워지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들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들은 세상에 너무 많았다.
217p 테트리스2009
 
그녀의 나이가 43이라고 하셨던가? 여자 나이 마흔에 비로소 느끼게 되는 어느 경지가 있는 걸까?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표현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사실 소설속 여주인공들의 삶과 사랑은 우울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읽는 동안은 이입된 감정으로 힘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실연을 겪고 있다거나, 아픈 사랑으로 상처받은 상황이라면, 다시 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책이 어쩌면 치료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게 아기와 신랑과 살아가는 삶을 살다보니, 아픈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이야기들이 사실 힘들게 느껴졌다.
 
나 또한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직도 순수한 사랑만을 꿈꾸고 지금의 이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라 믿고 싶은 소녀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사랑이라는 그 이면에 숨겨진 칼날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아, 어리석은 당신. 당신이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나의 운명이었던 거예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요.
206p 차가운 손
 
 
 어려서 읽었던 소공녀, 소공자가 아무리 해피엔딩이었어도 중간에 고난을 겪는 과정이 너무나 길었기에 읽는 내내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런 느낌을 이 책을 읽으며 받았던 것 같다. 훌륭한 작가의 좋은 표현으로 술술 잘 읽히면서도 인상적인 그런 단편소설들이었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그녀들의 사랑과 삶 이야기가 내게는 또다른 칼이 되어 꽂히는 듯 했다.
 
아직 상처까지 감싸안을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일까?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아이들 문학을 더 즐겁게 더 재미나게 읽는 것을 보면, 나의 미숙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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