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인문학 출판에 독특한 현상이라면, 유력한 맑시스트 진영의 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공공연한 호감을 드러내는 책들을 출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소위 '회심'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나, 고전적으로 '종교비판' 사실상은 '기독교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유물론적 사상으로 알려진 맑시즘 진영에서 이런 정도로 기독교에 호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실로 큰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물학이나, 심리학 동네에서 리차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등장하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유명한 테리 이글턴은 심지어 도킨스를 야단치기까지 하니 말이다.  

분위기는 알랭 바디유의 '사도 바울'에서 후끈 달아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이 파편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바울'에게서 찾았던 바디유의 논의는 신학이나 성서학 동네의 분위기에 비추어 보아도 이례적이다. 흔히 바울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가부장적 기독교의 정초자로 욕을 먹고, 비판적 학자들에게는 갈릴리를 배경으로 했던 예수운동의 동력을 거세하고, 헬라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종교로 '재창시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예수의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는 단절이 있다는 얘기들이다. 물론 바울과 예수를 봉합하는 수많은 시도들은 존재해왔으나, 소위 비판적 학자진영, 특히 맑시즘 진영이라면 더더욱 이런 식으로 바울을 비판하는 전통이 유구히 흘러왔다고 말할 수 있다. 바디유는 그런 면에서 바울을 매우 후하게 평하고 있다. 바울이야 말로 오늘날의 고민거리인 보편적 윤리가 더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 시대에 그 가능성을 온몸으로 내보인 인물이란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의 논의를 이어서 '메시아적 시간'을 논한다. 그의 책 '남겨진 시간'은 로마서 1:1에 대한 주석이자, 자신의 정치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저작이다. 맑시즘 전통이 급기야는 메시야까지 호출해내고 있다. 물론 이 논의는 발터 벤야민의 것이고, 그는 유대교적 메시아 이해에 충실하긴 하나,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상당한 친화성을 읽어내는데 무리가 없다. 

인기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또 어떤가? 그의 책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의 서문에서 그는 '이제 맑시스트들과 기독교인들은 바리케이드의 이편에서 연대하여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전선에 연대해야 한다'고까지 쓰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이 둘이 친했단 말인가? 세상이 바뀌긴 많이 바뀐 모양이다.  

정치사상, 혹은 정치철학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결국은 고대와 중세의 정치신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란 과제를 수행하면서 형성된 것이란 점을 상기하면, 정치와 신학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맑시즘 사상가들이 그간 기독교를 비판해온 이유도, 이제 기독교를 재평가하면서 전유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결국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언어로 나아가고자 하는 추동력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의 전통 안에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엄청난 정치적 경험과 통찰이 축적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 같은 책이 매우 냉정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정치철학은 결국 정치신학에서 정치와 신학을 분리하고자했던 근대적 과제에서 탄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국운은 '헌법'에서 바로 이 근대를 태동하였던 제 정치사상들이 '헌정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을 기독교적 관심사와 더불어 간명하게 잘 기술해주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왜 개신교인들이 우파정치에 몰두하는가는 사실은 좀더 긴 정치철학의 배경과 더불어 감상되고 비판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즉자적 문제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비판 가능하나, 그런 문제들 조차도 연원을 짚고 들어가면 할 얘기들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이참에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자는 얘기이다. 퀜틴 스키너의 '근대정치사상의 토대'가 1편만 번역되고, 2편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개신교 종교개혁이 근대정치철학의 탄생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공부할 꺼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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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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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고리타분한 문서가 아니라, 정치의 최고봉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입문서. 저자의 강의도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그의 글도 입에 짝 붙는다.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Volume 2, The Age of Reformation (Paperback)
Skinner, Quentin / Cambridge Univ Pr / 197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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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천 교수는 2권을 속히 번역하랏!!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
켄틴 스키너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길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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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된 신-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
마크 릴라 지음, 마리 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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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참 깔끔하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해 앞으로 상당기간 마크 릴라가 주요한 논객으로 활동을 할 듯 예감을 준다. 다만, 역사를 잘 훑은 다음에 오늘의 미국상황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 평가를 보여줄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의외로 꼬리를 내리는 느낌? 수상해... 뭔가...
믿음에 대하여- 행동하는 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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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재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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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겨진 시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
조르조 아감벤 지음, 강승훈 옮김 / 코나투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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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번역이 약간씩 오락가락 한다. 성서판본으로 공동번역을 쓰는 건 이해해줄만한데, 신학용어들이나 교리적 내용은 가독성이 좀 떨어진다. 아쉽도다.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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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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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날렵한 세련된 영문학자를 연상했는데, 한국 방문시 본 그의 사진은 배나온 아저씨... 실망이었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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