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노스케 부부의 친절한 마음은 알겠지만 자신의 성격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한 이유로 성사되지 못한 혼담이라면 아쉽지 않다는 태도였다.

의외로 마음이 약한 데가 있는 다에코가 언니한테는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 반대일 거라는 걸 사치코는 잘 알고 있었다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을 운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처제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이렇게 되는 건 숙명인지도 모르지.」

데이노스케 씨와 사치코 씨가 보여 준 호의는 잘 알겠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 호의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매사에 소극적이고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한테도 역시 장점이 있는데, 그런 걸 시대에 뒤쳐졌다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보지 않고 그런 사람 안에 있는 여성다움이나 고상함 같은 걸 인정해 주는 남자도 있을 거라는 거지. 그걸 아는 사람이어야 처제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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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샤베르 대령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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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다 덮이지 않은 나무들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흐린 하늘이 만들어 낸 회색빛을 배경으로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다.

나무들은 엉성하게 수의를 걸친 유령들, 저 유명한죽은 자들의 춤2)의 거대한 이미지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연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고갯짓과 남편에 대한 거부의 몸짓도 감지되었다. 뜻밖의 패가 나올 때마다 터지는 노름꾼들의 탄성, 짤랑대는 금화 소리가 음악과 두런두런한 대화 사이로 섞여 들었다.

내 오른편으로는 어둡고 소리 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내 왼편으로는 삶의 격조 높은 바쿠스 축제가 펼쳐졌다

눈은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말하거나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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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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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과 읽다 만 소설책 한 권을 비단 보자기에 조그맣게 싼 것을 오하루가 들고 한큐 역까지 배웅하러 나왔을 때는 이삼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아주 가벼운 차림새였다

한번은 사치코가 에쓰코를 데리고 스이도미치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구더기가 들끓는 죽은 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옆을 지나쳐 한 2백 미터쯤 갔을 때였다.

정신이 어떤 한 가지 일에 쏠리면 오히려 이런저런 망상을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 흥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답답한 소리를 하더라도 무턱대고 야단치지 말고 찬찬히 타일러서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좋다는 등의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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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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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돌아다니는 사람 주위에는 죽음이 붙어 다닌다.

바깥에서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크리스폴티 거리는 거의 비어 있었다. 이제 고작 엄마라는 말만 할 줄 아는 꼬마 두셋이 보도 한가운데서 놀고 있었다.

톰마소는 바삐 할 일이 있지만 이웃들에 대한 호감 어린 배려에서 잠깐 짬을 내 몇 마디 잡담을 나눌 시간이 있는 사람처럼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잘사는 아버지를 둔 멍청한 자식들, 머리숱이 적은 학생 녀석들, 건들건들 불량해 보이고 싶어 하는 머저리들이었다.

톰마소와 알베르토는 오늘, 그곳 두에밀라 바에서 최고 멋쟁이였다.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가볍게 똥폼을 잡으며 우쭐댈 수 있었다

엄청난 부피의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 티부르티나 제방에 부딪힌 뒤 소용돌이와 거품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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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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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만족한 얼굴로 성당을 나와 아름다운 햇살 아래로 나섰다. 태양이 구름을 몰아냈고, 비에 씻긴 들판 여기저기 흩어진 마을의 흰색 집들을 상쾌하게 비추었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곱슬머리 몇 가닥이 목에 처량하게 붙어 있었으며, 눈이 졸린 것처럼 멍했다. 꼬여 있는 두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이제 높이 떠오른 태양이 햇살을 내보내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피에트랄라타를 비췄다. 집 담벼락은 말이 없었다. 담벼락은 말을 못하는 법이니까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했다. 잠시 후 기운 없이 혼자 서 있는데 톰마소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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