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다양성에 대해 그때 눈앞에서 펼쳐졌던 장면보다 더 확실하고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를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보지 못했다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그의 눈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아무도 보지 못했기를 바라는 희망, 커가면서 경험으로 지워버린 유치한 생각 ? 자기 시선만 돌리면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다는 ? 이 배어나왔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
빛나는 광채는 지나간 모든 것을 아주 낯설고 거의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고, 과거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릴 정도로 눈부셨다
‘1890년 5월 28일에 태어나 1954년 6월 9일에 사망한 알렉산드르 오라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여기 잠들다’라는 문장
‘1899년 1월 12일에 태어나 1960년 10월 24일에 사망한 마리아 피에다드 헤이스 드 프라두가 여기 잠들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1920년 12월 20일에 태어나 1973년 6월 20일에 사망한 아마데우 이나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 있었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내게서 잠을 앗아간 것, 빛이 반사되는 진열창 앞까지 산책을 하면서 내가 쫓아버리려 한 것은 서로 움켜쥐었던 이 손의 모습이었다.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타인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외면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해석된 몸이 주는 이중 굴절이라는 보호벽이 없이 우리가 마주 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이를 분리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어 서로 보는 즉시 와락 달려든다면?
이제 막 만난 이방인처럼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사람들이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의 인생에 결정적인, 어쩌면 치명적인 역할을 한 사람……
살라자르가 권력을 좇은 야심가이기는 하지만 끔찍한 잔인함과 무자비한 폭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방종한 잔치에 차려진 호화로운 음식을 즐기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통치 뒷면에 있는 메마른 삶의 억압된 욕구와 충동은 냉정하고 강력한 명령으로 나타났고, 국가이성이라는 수사학을 빌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기도 했다.
스위스의 중립성과 관계가 있었을까, 아니면 오로지 단어에만 사로잡혀 있던 그만의 문제였을까. 아무리 부당하고 끔찍하며 피비린내 나는 일도 묻어버리던, 그를 현혹하던 단어들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근시라는 사실과도…….
하사관밖에 되지 못한 아버지가 라인 강에 주둔했던 소속 중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레고리우스는 언제나 약간 우습다는 느낌, 아버지가 하는 말의 주된 의미는 천편일률적인 삶에서 약간 두드러져 보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억일 뿐이라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소멸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워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이 모호한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닳고 닳은 언어에 구역질을 느껴 포르투갈어를 새로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는 베른에 없었지만 베른에 있었고, 리스본에 있으면서도 리스본에 있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멈추었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었고, 이 세상도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자신이 학교와 학생들, 수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깨닫게 된,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격렬한 감정……. 그때와 같으면서도 동일하지 않으므로, 같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같지 않다는 것
이 방의 적막감은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었고, 그레고리우스는 완벽한 무공간성 속에 앉아 있었다
아마데우의 죽음이 아드리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리고 감정은 굳은 영혼의 용암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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