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문외한이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라는 문구를 조정래의 책에서 읽으며 수치심이 찾아 들었다. 그러나 작년에 엄청난 상심과 낙담을 겪은 후, 무기력감에 빠지며 관심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내가 미국 정치의 양극화 현상에 대해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적잖이 실망했으나 놀랍지 않다.

미국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이고, 그는 다시 재선에 도전하는 것 같다. 민주당 클린턴도, 각 언론사도, 심지어 공화당도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가를 모티브로 하여 미국 정치 역사를 돌아보며 양극화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햐결책을 제시하며 예상을 깨고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 역사보다 발전된 민주주의 형태를 언급하며 내일은 더 좋아질거라 끝을 맺음에 놀라기도 했다.

정치는 자기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집단의 위치와 결론을 방어하려는 본능과 정체성 보호 인지 기능을 발동시키며 사실적인 정보를 거부하기도 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며 지적 심연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라는 중독성 마약 앞에서 인간이 소유한 합리적이고 논리적 ‘이성’이란 이름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우리는 자신의 이성을 신뢰할 수가 없다. 인간의 정체성이 가장 위협받을 때 인간의 이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하지만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혼자서는 이성적일 수가 없고, 이성이란 본질적으로 집단의 이익에 기여하기 위해 집단 프로젝트라고 했다.

현재 미국 민주당(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등)은 진보적이고 공화당(주로 백인)은 보수적이다라는 양극화 체제로 굳혀졌다. Obamacare에 대해 단 한 명의 공화당표(상원, 하원 모두)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많은 공화당원들도 의료체제에 열린 마음이었더. 심지어 링컨은 최초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1964년 시민권법 제정 즈음으로 양극화가 조짐을 보인듯하다. 미국이 위기의 시기에는 오히려 정치체제가 평온하고 덜 양극화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공화당은 백악관, 상원, 대법원을 장악하고 있고, 민주당은 하원뿐이며, 이는 인기가 아닌 지리적인 요인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공화당은 펜실베니아 상원을 40년간, 오하이오 상원을 35년간 장악하고 있다. 언론과 정치는 또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 민주당 의원들은 특정한 한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취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Fox News가 47%(보수 언론)이었다. 양극화된 정치체제가 언론의 양극화를 부추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큰 목소리와 내용으로 미디어를 장악하여 득을 본 사람이 트럼프이다(media coverage 47%). 심지어 트위터에 철자가 틀렸다는 등의 기사로도 주목을 받으며, 다른 후보들의 모든 정책을 묻히게 만들었다.

미국 인구수를 볼 때 인구 다양화로 백인 인구수가 줄어들면서, 과거에는 백인들이 당연하게 누리던 특권이었으나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 기회를 트럼프가 교묘하게 이용했다. 백인 고졸자들이 느꼈던 위기의식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특권에 익숙해지면 평등이란 단어도 압박처럼 느껴진다는 문장이 슬프게 들린다. (When you are accustomed to privilege, equality feels like oppression.) 라틴계나 아시아인들의 인구수가 많아짐에 설자리가 좁아지게 된 백인들이 트럼프의 포플리즘 공약들을 지지했을 것이다.

양극화의 해결책이라기보다 수정 방안으로, 채무한계(debt ceiling) 폐지, 비례대표제(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실시로 양당체제가 아닌 제 3당 만들기, 필리버스터(filibuster) 폐지 등으로 경쟁이 있는 건강한 정치 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국민들이 항상 의식이 깨어 있어야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대통령 선거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방 선거에 더 열정을 쏟음으로서 적극적으로 내가 사는 지역을 바꾸어 갈 수 있다고 했다. (national < state or local)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 역시 대통령 선거에는 관심이 높은데, 도, 시, 구역장 선거에는 덜 열정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 나이키 회사 경영진이었던 사람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처가 너무 커서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한 사례가 나온다. 시골에 가서 살면서 마트도 사람이 적을 때 가고, 심지어 친적집 방문시에도 가족들이 민감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도록 서로 조심시켰다고 했다. 그가 트럼프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좋아서가 아니라 클린턴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기득권은 가진 것을 절대 빼았기면 안되고, 내가 가진 것이 위협받으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다. 내 상식으로는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나, 정치는 내 소견을 월등히 넘어선다.

미국 정치 체제를 잘 몰라서 어려운 것도 있었고, 너무 오래 읽어서 전체 흐름을 잊은 것도 있어서 리뷰 쓰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럼에도, 읽은 것으로 끝내면 읽지 않은 것이 된다는 나만의 원칙으로 무리하게 리뷰를 쓰다보니 중언부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한국의 정치를 보는 듯했다. 미국처럼 Blue vs. Red로 나누어진 한국 정치의 위상은 어디 즈음에 있을까? 작가가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한국 정치에도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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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독서 모임 때문에 이 책을 구매했고, 인지도가 높고 수상작인걸 알지만 책에 대한 스포일러 없이 백지 상태로 읽고 싶었다. 전반부에서는 31살 캐시가 헤일셤에서 보냈던 시절의 내용이 계속 되어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가 만난 친구들, 선생님들, 학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리 만큼 섬세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보낸 학교 생활은 나의 동심과,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림을 창의적으로 잘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통해 그들 내면 즉 영혼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고, 그들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가지러 오는 마담이 그들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걸 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악전 고투하는 루시는 ‘나의 근원자’를 찾기위해 친구들(5명)과 함께 노퍽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들의 우정과 사랑과 특별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친절과 이해로 무장하고 그림을 보아주는 제럴딘 선생님에 대한 애정, 적어도 한 사람(루시 선생님)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위안을 받는 토미, 커플이 되면 당사자들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상대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조언을 루스에게 하는 캐시, 가장 친한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계획한 자신을 자책하는 캐시 등. 평범하고 잔잔한 그들의 일상은 우리 삶과 꼭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 즉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들이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 내 마음 속에 그늘이 찾아 들었다. 윤리적 딜레마에 갇혀 있는 복제 문제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모습으로 그려도 되는 것인가? 지나친 감정이입은 이성을 마비시켜 판단을 흐리게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로봇도 우리 일상을 파고들어 삶의 편이를 도모하고 있는 시대에 사유하는 로봇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오래 전에 등장하지 않았는가? 나는 로봇과 공존 및 공생하는 시대가 올거라 생각했는데 클론의 생명의 존엄성도 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의 유한함 때문이리라. 복제를 통해 기술 문명의 우월성을 과시하며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교만함이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부르지 않을까? 한편으로 인간과 클론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을 맞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클론은 시기가 조금 빠르며 수단으로 이용됨을 알고 있다는 것뿐. 인간인 우리도 죽음의 때가 반드시 노년이 아닌 경우도 많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하는 슬픈 현실이다. 클론도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창의적인 활동에 매달리지만, 인간이 몸으로 살아 있으되 그 영혼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근원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클론의 모습도 인간과 많이 닮아 있다. 물질 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 살면서 과연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물질, 시간, 명예, 허영, 사치의 노예로 살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도 모르고, 공허감과 허무함을 끌어 안으며 기댈 수 있는 근원자도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은 아닐까?

삶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면서 장래 희망 토론을 하며 달콤한 부유 상태에 머물며 일상적 제약에서 해방감을 얻으려는 클론의 삶에 대해 이질감이 아닌 동병상련의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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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하나님께 인문학을 하나님께 1
한재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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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ok must b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이다.)는 Franz Kafka의 명언이다. 그 도끼가 나를 위로하고 안내하는 나침반이었다. 그 보다 세련되고, 지혜롭고, 변함없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 전공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과 계열은 이해가 더딘지라 인문학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여 본질에 접근하게 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그 인문학을 성경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작가는,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주신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인문학에 성경의 옷을 입혔다. 이 책을 읽고, 성경을 돌아보니, ‘성경이 문학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에 진하게 공감한다. 비유, 은유, 반복, 직유 같은 수사학적 장치가 많아 이해가 어렵기도 하지만 얼마나 따뜻하고 감동적인 문구가 많은지 모른다. 나는 현재 영어로도 성경을 읽고 있는데 또 느낌과 감동이 다르다. 내가 예전에 읽은 책도 많이 있었는데, 거기에 작가가 성경적 해석을 입히고 나니, 내가 읽었던 그 책이 다르게 보인다.

나는 왜 그동안 책에 많은 집착을 보였는가?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했다. 나는 철학책 원서를 막힘없이 매일 읽는 그 날이 오면 내 안의 공백에 모두 채워지고,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잠들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난 심리학과 철학 및 자기계발서에서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그 도끼들도 유통기간이 항상 있었고, 세상의 풍파는 모두 잠재우지 못했으며 난 늘 불안한 존재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인간은 절대자, 영원에 대한 근본적인 그리움이 있다는걸 작년에 알게 되었다.

책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었고 인문학이 주는 무한긍정은 부정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그 책이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함께 비를 맞으시고, 함께 공감해 주시고, 우산까지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인문학이 그 동안 내게 큰 선물이고 친구였던 것은 확실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명답이었고 정답까지는 주지 못했으며 오로지 성경만이 정답이었다.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시, “가지 않은 길(by Robert Frost)”은 나를 매우 우울하게도 했다. 가고 싶었으나 가지 않은 길이 있었기에, 그 때 현재가 아닌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어땠을까를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가지 못한 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가지 않은 길을 자랑스러워 하리라. 또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Unharvested by Robert Frost)” 이란 시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안 거두어들인 것이 늘 있어서 그 향내 맡는 일이 죄가 되지 않게 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와 비슷한 하나님의 말씀을 레위기에서 읽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룻과 보아스의 위대한 만남이자 최고의 로맨스가 보리 이삭을 다 줍지 않은 흘림의 밭에서 이루어졌음을 볼 때, 고아, 과부, 거류민을 위하시는 속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라도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동안 능력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빈틈없이 노력하고 채우려고만 했다. 그런데, 부족함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고, 인생의 아름다움 중 하나인 그리움과 설레임은 부족하고 결핍될 때 나온다고 하니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은 또 나에게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예배, 기도, 성경 통독을 넘어, 전도 선교, 구제로 이어져야 한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의미를 가지듯이,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어 택한 백성으로 삼아 주심에 나는 얼마나 감사한가? 고 신영복 교수님은 “담론”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블러 주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복음 전도는 다섯 번 이상의 접촉이 필요했는데 요즘엔 12~20번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만남은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기적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걸 아는데 그 섬에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이 책은 또 많은 은혜를 받고 갚지 못한 빚진 자로서 살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는지, 너무 쉽게 불평하는 교만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다음에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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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Bias)은 매우 익숙한 단어이고 심리학 책을 읽을 때 마다 수많은 편향을 만나며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된다. 확증편향, 앵커링 효과, 편향의 편향(Bias bias)까지 셀수 없을만큼 많은 인지 편향을 통해 나는 항상 틀릴 수 있고, 내가 알고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인정하게 된다.

편향(Bias)과 달리, Noise(생각의 잡음)는 백그라운드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판단의 다양성을 가리키며, 판단이 있는 곳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언제나 Noise가 존재한다. Noise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독특함과 다양함으로 일어나는 부산물이다. 일반적으로 다양성과 독특함은 창의성을 유발함으로 환영받을만한 선물이지만, 여기서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전문가가 내리는 판단과 결정의 다양성이라서,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불공평을 유발하기도 한다.

Noise는 의학, 법, 경제 전망, 보험료 산정, 사원 선발 및 승진 문제까지 전반적인 분야에 다양하게 발생한다. 똑같은 범죄를 두고 내려지는 형량이 판사마다 판이하게 다른점, 같은 병명에 대해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다른점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한다. 판사가 배가 고플 때, 혹은 점심 식사 후에, 지지하는 프로 야구나 농구팀 우승 직후냐에 따라, 즉 판사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피고인에게 판결하는 형량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Noise는 시스템내에서 level noise, pattern noise, occasion noise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인과관계는 상관관계를 암시하지만,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인과관계를 말해주지 못한다. 이 둘의 관계를 혼동힘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수십년간 억울한 상황에 놓여 고충을 겪은 사례도 많다. 대부분 범인뿐 아니라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도 합리적 근거를 넘어 과도한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짐으로써 많은 Noise를 일으키며 실수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다. Bias는 찾기 쉬운 반면, Noise는 보이지 않는 적이며, 보이지 않는 적과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승리일 뿐이지만, Noise 감소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줄이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판단의 목적은 개인의 표현이 아닌, 정확성이어야 한다. 둘째, 통계학적으로 사고하고 사례의 외부관점을 고려한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난받지 않으나, 불완전한 인간에게 예견되는 겸허함 부족은 비난받을 수 있다. 즉, 부족함의 한계를 외부 관점의 사례를 이용함으로써 중요한 통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팀간 대화를 최소화하고 독립성을 확보하여, 정보를 왜곡시키는 과도한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넷째, 초기단계에 직관력을 자제하고, 오히려 직관력은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고, 잘 훈련받은 상태에서, 나중에 발휘해야 한다. 다섯째, 다양한 의사 결정자로부터 독립적 판단을 얻은 후, 그걸 모아서 종합적 판단을 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와 척도를 선호하라고 한다.

마치 손을 청결하게 하고 위생관리를 함으로써, 신체 건강을 유지하듯, 결정위생원칙(decision hygiene principles)을 통해 Noise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Noise 감소 전략은 많은 비용이 들 수 있고, 번거로울 수 있으며 단점도 안고 있다. 또 어떤 Noise는 오히려 다양성 유발로 인해 바람직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대안으로 알고리즘이 판단과 결정을 하게 할 수 있으나, 알고리즘 역시 인간이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중요한 최종 선택에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며, 그들의 얼굴 없음은 불신을 낳기도 하고, 잘못 관리하면 전문가들이 자율성이 침해받는다고 느끼게 되어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단점도 제기된다.

결국 모든 위험과 단점은 충분히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Noise 감소에 대한 반대 의견이 일리는 있으나, 손익계산을 하되, Noise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Bias와 Noise는 실수와 불공평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 스스로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Noise가 생김으로써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걸 항상 염두에 두고, 우수한 의사 결정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a shadow of doubt)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증거를 열린 마음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업데이트(relentless updating) 하기를 권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명언이 떠오른다.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실패가 기본값인 인간은 판단과 결정에 있어 실패할 수 있다는걸 받아들이고, 실패하되 더 잘 실패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현재 어떤 존재이냐가 아니라 현재 무엇을 하느냐이다(What makes them so good is less what they are than what they do.)’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하루에도 크고 작은 결정과 판단을 해야할 때가 있다. 나의 직장에서 실수를 줄이고, 나의 판단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기는걸 최소화하기 위해, 현재 내 모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지적 결함(cognitive flaws)을 줄이고 객관적 무지(objective ignorance)를 항상 기억하며, 편향과 잡음(bias and noise)을 줄이기 위해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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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을 반복할 경우 편안함 보다 지루함을 먼저 느끼기에 새롭고 신선한 것을 원한다. 새로운 자극이 어떤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새로 접한 것이 기존의 틀을 벗은 경우, 자석처럼 끌리며 나도 모르게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을 경우 답은 과거의 지식과 경험에서 찾으려 한다. 이 소설이 딱 그랬다. 첫 장을 열었을 때 많이 달랐다. 보통 소설이 인과관계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반드시 뒤에 가면 이유와 결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기다렸다. 여전히 말이 안되는 상황은 계속 되었으나 마지막 장에서는 속시원한 답을 줄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부조리한 이 소설이 답이 없는 이 세상을 모델로 하는가?

글을 쓰지 않으면 죽어야 하고, 본인은 문학 외에 그 어떤 사람도 아니며,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 글쓰기였던 Kafka가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법학박사까지 받았다. 정신적 폭력을 가했던 아버지를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이 소설을 썼을까? 법학을 전공한 작가라서 사법부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아서 불공정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까? 무죄라고 소리쳐 봐도 모든 인간은 유죄 판결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결국 수치심만 남기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걸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너무 너무 어렵고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은행 고위 관리직원이던 주인공 Josef.K는 30번째 생일 날 기소당하고, 이유도 듣지 못하며, 그가 기소당함을 받아들이고 무죄임을 증명하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는 실패하고 채석장에서 죽임을 당한다. 기소당한 이상 이유 불문하고 유죄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판사를 만난 적도 없고 주위에 도와 주겠다는 사람들(uncle Karl, advocate Huld, manufacturer, painter, Block, Leni)은 많지만,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고, 누가 정직을 말하는지 알 수도 없다. 결국, 거짓말이 세상 질서에 기본이란 말인가.(It makes lie fundamental to world order. p. 177)

주인공은 이유없이 기소 당했는데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시키는대로 일요일 날 법원에 출석을 한다. 체포 영장없이 체포되었다고 해도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다. 이 체포는 도둑의 경우와 달리 ‘학구적인 어떤 것’(something scholarly. p. 16)이라고 하고 있다. 법을 위반한 경우가 아니어도 누구나 체포될 수 있고 기소 당할 수 있는 죄인이란 뜻인가? 지식인으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무죄를 벗을 수가 없었다.

작가는 유대인으로서 무신론자로 되어 있다. 중간 즈음에서는 사법부의 비리와 부조리를 파헤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읽었지만 석연치 않다. 성당에서 만난 사제(prison chaplain)가 예시로 들었던 ‘법원 앞 문지기’(Before the law stands a door-keeper. p. 170)의 비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혹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과연 누가 속인 자인가? 뇌물을 받으며 법원을 끝까지 못 들어가게 하고 헛된 구원의
메세지(message of salvation, p.172)만 준 문지기가 기만자인지, 문지기의 옷에 묻은 벼륙에게까지 법원을 들어가게 해 달라고 도움을 간청하던 시골에서 온 그 사람이 기만자인가?

법원 안으로 들어가면 판사 즉 심판주가 기다린다. 아무도 이 책에서 심판주를 만나지 못했다. 주인공이 채석장에서 죽게 될 때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친구인가? 선한 자인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논리는 흔들지지 않은 진리이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가 만난 적이 없는 판사는 어디에 있고,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고등법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판사와 고등법원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다’(everyone has his own cross. p. 107)는 표현이 있었다. 원치 않아도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일까? 부귀영화와 신분의 비천함 상관없이 모두 피고인으로서 결국 구원의 손길을 얻지 못한 채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함을 이야기 하고자 한걸까? 왜 작가는 희망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는지 답답하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친구, 선한 자, 논리(Logic)가 해결하지 못한 구원의 손길이 어디서 올지는 독자 스스로 찾게한다.

어렵고 난해했으나 원인과 결과를 찾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잘 따라 읽었는데, 미궁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야속하지만 ‘생각의 힘’을 기르게 해 주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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