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비밀 -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4
강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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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고전 문학을 번역하지 않고 놔두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천병희 선생이 비슷하게 말한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로마 고전을 원전 번역하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고대 서양 문학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은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

 

그런데 고대 서양 고전은 원전번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읽어서 재미를 느낄지언정(사실 일리아스를 읽고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건 허세일 가능성이 높다.) 저자가 의도했던 것까지 완벽히 느끼기는 어렵다. 특히 모 인문학 강의에 따르면 고대 서사시는 '형식미의 극치'인데, 일반인들은 멋들어진 문장 밑줄 쫙 긋고 정작 작품의 구조는 지나치기 십상인 것이다.

 

천병희 선생이 원전 번역에 애쓰고, 강유원은 길거리 인문학자로서 일반인들에게 고전을 접하도록 한다면, 강대진은 번역도 하고 강의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고전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자칭 '전공자'이다. (이 말에 본인은 스스로를 번역가, 강사라고 버럭한다면 상당히 미안한 일이지만, 평소 셀프디스를 즐기는 그의 문장들을 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리라이팅 클래식시리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해설서를 매우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을 다시 읽게 해준 이 책 '비극의 비밀'이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아 '안티고네'에는 멋진 문장이 상당히 많다. 흔히 논어나 성경의 문장들을 인용하는 것처럼, 이 두 작품에서도 글을 쓸 때, 주장을 펼쳐 나갈 때 (혹은 댄 브라운처럼 고전 코드를 이용한 소설을 쓸 때) 이용할 만한 문장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나의 고전 읽기는 거기까지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기 프랑스의 역사, 저자 위고의 정치사상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고대 희랍 비극은 고도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기에 전공자들의 강의, 해설 없이 충분히 소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시조의 '3434 3434 3543'이라는 형식을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형식미와 더불어, 이 책은 전공자의 친절한 해설 없이는 느끼기 불가능한, 천병희 선생의 주석만으로는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을 만져주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의 928행을 보자.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이오카스테를 만나면서, 합창단장이 이오카스테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자.

 

'... 이 부인이 그 분의 자녀들의 어머니시오.' - 천병희 역

 

'이 분은 그의 부인이자, 그의 자녀들의 어머니라오' - 강대진 역

 

다소 다르다. 강대진은 해설은 곁들인다. '희랍어는 어순이 매우 자유로운데, 지금 이 문장에서 '부인'과 '어머니'라는 말이 나란히 나오기 때문에' 이 문장은 희랍어 어순으로 직역하면 "이분(이오카스테)은 그(오이디푸스)의 부인이고, 어머니... 그의 자녀들의" 라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청중들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강대진의 말대로 전공자들의 해설이 아니면 현대의 한국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처럼 지적 허영을 원한다면 이 책을 꼭 권한다. 저자는 천병희 원전을 먼저 읽은 후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지만,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 재미있다. 오히려 이 것을 읽은 후 흥미가 생겨 원전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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