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일격 밀리언셀러 클럽 136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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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인공 매튜 스커더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설명서이자 캐릭터 해설집과 같은 작품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4편인 [어둠 속의 일격]은 직전에 읽은 [살인과 창조의 시간]과 비교하면 사건 해결에 그다지 깊은 관심을 쏟는 작품은 아닙니다. 물론 핵심적인 사건은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사건을 결국 해결해 냅니다. 그러나 [어둠 속의 일격]에서 누가 범인인지, 어떤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정작 이야기의 핵심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 합니다.

   더 중요하고 중심적인 이야기는 알콜올릭이자 유사탐정(정식 탐정 라이센스를 발급받지 않았다고 여러번 강조합니다. 뭔가 차별성을 위해서 인가봐...)인 매튜 스커더에 대한 여러가지 성향과 기질, 성격, 말투와 태도 등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과거사(경찰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정리합니다.

 "경찰에 대한 환상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사법 제도에 대해 믿음을 가진 적도 없어요. 그건 끔찍한 시스템이고 경찰들은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죠. 부패라면, 원래 이상주의자도 아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신경 쓰이지도 않았고." p117 

"즉시 그만두진 않았어요.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만뒀죠.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죄책감이겠죠." "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경찰로 산다는 게 더 이상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p119~120

   이 때 경찰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을 통해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주인공 스커더는 기본적인 인성이 도덕적이고 상당히 양심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치관도 상당히 정직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런 장점은 술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정 자체가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그의 탁월한 능력은 경찰조직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러브콜로도 확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경찰로 돌아오고 싶다면 이것보다 더 확실한 통행증도 없다는 거지. 6구역 경찰서에 있는 에디 퀄러랑 이야기를 해 봤는데 자네는 아무 문제없이 복귀할 수 있을 거래." p248


   한편 주인공 스커더의 가족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됩니다. 참 희한하게도 미국은 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가정은 거의 대부분 이혼을 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은 늘 자기 일에 대해 병적일 정도록 몰두하고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가정도 행복하게 잘 꾸리면서 사건도 잘 해결하는 주인공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2. 사랑하는 이를 '상실 시킨자'와 '상실 당한자', 잊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거쳐야하는데, 덮을 것인가? 파헤칠 것인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은 묻지마 연쇄살인자에 의한 연쇄살인이지만 거기에 놀랍게도 무임승차한 범죄가 있고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는 피해자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피해자 가족의 이중적인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사건의 진상을, 범인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그 진실을 파헤치고 밝히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치부가 들어날까 두려운 마음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그려놓았습니다. 두가지 마음다 공감이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결국 중간에 조사를 중단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절한 스커더씨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것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멈추진 않겠어요" p163

   전작에서 죽은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에서 충분히 강직한 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의뢰인이 그만두길 바라는데도 그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결국 끝까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고 의뢰인의 염려마저 해결해 줍니다. 아, 친절한 스커더씨... 이 얼마나 대단한 주인공인가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게 그의 기본적 사고방식이었고 살아가는 자세였다. 설령 어떤 격한 고통이 다가온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므로." p21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실망이 될 수도 있으며 치명적인 치부가 될 수도 있지만 역시 모르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실을 밟고 일어설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루키의 표현처럼 인간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3. 그나저나 어둠속의 일격은 어디에?

   전 작 [살인과 창조의 시간]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어둠의 일격]은 뭘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꼭 제목이 내용에서 따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제목을 붙인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뭔가 임팩트 있는 제목이 있다면 그 임팩트가 어떻게 형성되어서 어떻게 풀려나가는지 풀어내서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쉽게 납득할 만큼 주제와 본문 내용의 연관성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시리즈가 독자에게 깊이 고민할 만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묵직한 작품은 아닙니다. 어쩌면 킬링 타임용으로 적당한 책이 될지도 모릅니다. 장르물을 반복해서 여러번 읽는 독자는 거의 없기는 하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서사에만 의존하는 작품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건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달까? 어차피 의뢰인도 포기한 의뢰고 말입니다.

   매튜 스커더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이 작품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도 조만간 만나게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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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아갈 용기 - 말 못 할 콤플렉스와 우울로 인생이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자존감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이세진 옮김, 뮈조 그림 / 더퀘스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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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적 어려움들을 잘 설명하는 입문 교양서.

   이 책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대표적인 컴플렉스에 대해 설명하는 책입니다. 깊이 통찰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런 류의 대중 심리학 소개서는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면 교과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깊이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내용 정리와 예시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유독 정리가 잘 된 느낌입니다. 또한 정리된 각 챕터들에 대한 짜임새도 상당히 좋습니다. 정확한 정의는 물론 해당 용어에 관련된 핵심 문제나 알아야할 사항들을 잘 분류해서 설명합니다. 지겹지 않도록 중간 중간에 삽화도 넣고 우스꽝스런 예시도 삽입해 두었습니다.

   프랑스의 정신과 전문의이자 심리치료사 '크리스토프 앙드레'와 좌파 일간지에 만평을 실어 유명해진 일러스트레이터 뮈조가 함께 쓴 이 책은 여러가지 정신적 어려움과 문제가 누구나에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상존하고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적절히 다스려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강요하지 않고 '나도 비슷한 문제가 있거든, 내가 더 심하거든?' 하며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서로 자기 몸 낮추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돌아보고 돕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입문서나 교양서로 상당히 훌륭한 책입니다.



#2.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심리적 어려움과 컴플렉스

   이 책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벼운 수준의 컴플렉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심', '자기주장 결여', '자신감결여', '자존감결여' 등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태도에 관련된 문제점을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각 용어들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몇가지 방법이나 처방을 알려줍니다. 이런 방식은 상당히 안정적인 전개방식입니다. 크게 보면 어떤 어떤 문제점이 있고, 각 문제점은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며 결국에는 어떤 접근이나 실용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독특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일반 심리학 서적인데 '건강염려'증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이 그만큼 건강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건강과 질병의 사이가 무척이나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인데, 지나친 건강염려에 의한 행동들이 자신의 건강을 무척이나 해치는 그런 상황을 꼬집고 있습니다. TV에서 특정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하면 그것만 주구장창 먹어재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건강을 너무 챙기는 사람이나 건강에 너무 무심한 사람이나 둘다 양극단이라 좋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역시 '균형과 중용'이 정답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여느 심리학 서적에서나 빠지지 않고 지적하고 있고, 현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현상 중 하나인 우울에 관해 큰 파트를 배분하고 있습니다. 기분과 기질이 무엇인지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기 저하와 기분 부전증을 '마음의 감기'로 표현하고 있고 그 이상 심각한 상태인 우울증과 주요우울장애에 대해, 더 나아가 순환증과 양극성 장애에 대해서 그 치료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순서대로 편안하게 따라 읽어가다보면 사실 누구나 어디에서건 어느 정도건 걸리지 않을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불편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시나 저자의 집필 태도와 여유 때문인 듯 합니다.  



 #3. 자신감이 넘치는 인생을 살기위한 기본적인 태도 유머감각...

   결과적으로 자신감 넘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태도라는 것인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프랑스 저자와 일러스트레이터가 펼치는 유머는 너무 생뚱맞아서 인지 저에게는 전혀 코드가 맞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내용은 이해가 쉬운데 이들이 풀어놓은 유머 보따리가 힘들어서 짐싸서 집에 보내고 싶었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식 육아는 유용한지 몰라도 프랑스식 유머는 유통불가 판정을 내리고 싶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망적이게도 이 책에서는 이런 여러종류의 정신적 장애나 컴플렉스를 안고 있다고 치더라도 전혀 절망적이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자를 다룰 때의 목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환자를 흠결 없는 정상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환자가 개인적으로 좀 껄끄러운 정신적 문제가 있더라도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뿐이다."p226

   이런 신경성, 정신성 병은 사실상 완치가 어렵기도 하고 의외로 이런 마음상태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장점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삶 가운데 즐거운 부분, 억지로라도 긍정적이고 좋은 부분을 찾아내고 그것을 만끽하려는 태도는 결국 자기자신의 인생을 기쁘고 풍요롭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부족한 것, 나쁜 것, 잘 안되는 것에 시선이 머물러 있으면 어떤 상황에 놓여도 똑같이 불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삶의 실생활, 일상 속에 유머를 놓치면 안됩니다. 이 책을 읽어본 결과, 유머도 다 같은 유머는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식 유머를 장착해야 합니다. 프랑스식 유머를 장착했다가는 주변의 외면으로 인해 더욱 깊은 우울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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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학 150호 - 2013.겨울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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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최근 발표되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읽었습니다. 온 집안을 도배하느라 짐도 엉망진창이고 어디 제대로 앉을 곳도 없는 상태에다가 뜨거운 햇볕으로 땀이 흐르는 상태로 이 작품을 읽었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야기에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값인 탓도 있겠지만 뭔가 모를 흡입력이 늘 있습니다.

   좋은 작품을 쓰는 훌륭한 작가는 늘 제목을 잘 짓는 것 같습니다. 초창기 장편 '노르웨이의 숲'이 그러했듯이 [드라이브 마이 카]도 비틀즈의 정규앨범 러버소울의 첫번째 곡이네요. 노르웨이의 숲이 두번째 트랙이었으니 이번엔 세번째 트랙 이름을 차용해야 될 듯 하지만 첫 곡의 제목을 따 왔습니다. 물론 가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듯 합니다만, 다만 이 작품의 내용 자체가 주인공 중년 배우 '가후쿠'가 차 사고를 낸 이후 운전사인 '미사키'를 고용하게 되면서 그녀와의 대화 가운데 전개되는 아내와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보니 제목과 책 내용은 잘 매치가 됩니다.



#2. 한결 같은 하루키 작품의 캐릭터들...

   사실 하루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인 경우도 많고 매우 다양합니다만 주인공에 한해서는 대체로 한결같은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사교성이 좋거나 대성한 인물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내성적이고 고독하고 친구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고, 일반적인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정상의 범주에서 보면 항상 양 끝단 어디 즈음에 가 있는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러합니다. 주인공 '가후쿠'는 성격파 배우이지만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딱히 친구가 없고 늘 혼자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궁암으로 죽자 더욱 우울해집니다. '가후쿠'의 드라이버로 고용되는 '미사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운전 솜씨는 누구못지 않게 훌륭한 여성이지만 딱히 말이 없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역시나 전혀 사교적이지 못합니다. 작가 자체가 그런 성격이기도 하지만 늘 하루키는 이런 사교적이지 못한 주인공 캐릭터를 내세워 사교는 못하지만 사고는 많이 하는 인간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덧칠합니다. 물론 그의 에세이에 훨씬 가볍고 흥미롭게 나타내기는 하지만 말이죠.



#3.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

   주인공 '가후쿠'의 아내는 미인이자 인기 많은 주연 배우였습니다. '가후쿠'는 그런 아내를 사랑했고 관계가 원할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생전에 작품활동을 같이 한 남자들과 여러차례 관계를 맺은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지나간 일이니 그냥 덮어둘 만도 한데 계속 생각하고 끝까지 알고 싶어 합니다.

"상상은 예리한 칼날처럼 시간을 들여 사정없이 그를 난도질했다.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게 그의 기본적 사고방식이었고 살아가는 자세였다. 설령 어떤 격한 고통이 다가온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므로." p21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내가 그녀를, 적어도 소중하게 여긴 일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녀가 죽고 없는 지금, 아마 그건 영원히 이해 못 한 채 끝나 버리고 말겠지. 깊은 바다에 빠진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죄어 드는 것만 같아." p37

   남자 입장에서 이런 상황에 빠진 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입장이 되는 일입니다. 어지간하면 용서할 수 없을테고 진작에 관계를 끝내거나 아내에게 따지고 들었겠지요. 그러나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이 그랬던가 봅니다.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라면 일단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말았겠지만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전형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례적인 행동을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이런 답답한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아내와 관계를 맺었던 배우 '다카쓰기'와 친분을 가집니다. 그를 알아감으로써 아내가 매력을 느낀 부분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깨닫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납득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다카쓰기'가 그냥 육체적인 관계만 맺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카쓰기'로 부터 아내를 아는 것에 대해 이런 고백 아닌 고백을 듣습니다.

"아무리 깊이 서로를 이해하는 상대라 해도, 그토록 사랑하는 상대라고 해도, 결코 남의 마음을 그냥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걸 바라다가는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워질 따름이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그래서 노력만 한다면, 노력한 만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솔직한 자세로 화해하는 게 아닐까요. 정말로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스스로를 깊고 진솔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p39

 

   어떤 면에서는 배우라는 것은 참 좋은 직업입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항상 타인의 삶으로 들어갔다가 때가 되면 자연히 걸어 나오게 되니까요. 주인공 '가후쿠'는 오늘도 무대에 올라 타인의 삶이 되었다가 극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현실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떠나기 이전과 무언가 조금은 달라져 있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떠나고 또 늘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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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과 창조의 시간 밀리언셀러 클럽 135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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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만난 매튜 스커더의 매력

   저는 영미나 유럽 소설은 많이 읽지 않은 편입니다. 뭔가 심심해서인지 확 끌어당기는 매력을 아직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만난 미국 작가 로랜스 블록의 [살인과 창조의 시간]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 세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일단 제목이 상당히 끌렸습니다. 뭔가 있어보인달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도 '으응? 그래서 왜 살인과 창조의 시간인데?'하는 생각이 계속 들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목은 멋지고 내용은 재밌으니 말입니다. 에또.. 복잡하고 어려울 것 없는 장르소설이니 그냥 읽고 즐기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같은 입문자를 위해서 약간의 해설이나 역자의 말, 편집자의 글 같은 것들이 책 말미에 조금 포함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장르소설의 핵심 과제는 역시나 '저변확대', '대중화'이니 만큼 말이죠)

   초반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꾸 김중혁 작가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 등장하는 '구동치'가 떠올랐습니다. 구동치라는 인물을 대하면서 느꼈던 이미지가 뭔가 어두운 일을 하면서도 강직하고 가슴 따뜻한 인간의 본성을 놓지 않는 휴머니스트 같은 느낌이 있어서 무척 매력적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매튜 스커더 역시 비슷한 장점을 가지고 있더군요.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설정에서도 이번 작품속 매튜 스커더의 행동과도 유사점이 있구요. 캐릭터 자체만 봐도 상당히 여린 면도 있고, 이혼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틈만 나면 생활비를 붙여 주는 모습이나 이익만 취해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우직한 면도 전반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뜬금없이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서 10의 1조를 헌금한다거나 하는 모습도 직접적으로 닮지는 않았지만 인간적으로 따뜻한 면이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2. 담백하고 깔끔한 전개의 매력.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전개인 것 같습니다. 사건의 큰 틀이 초반에 툭 던져지고 그 틀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크게 벗어나는 것도 없고 작가가 독자를 농락하는 희한한 반전도 없습니다. 아, 물론 마지막에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없으면 너무 심심한 정도의 일반적인, 극적인 요소에 반드시 필요한 정도의 반전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 정도의 마무리를 반전이라고 할 수나 있을지 궁금할 정도의 정석적인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미국 장르소설이 대체로 그러한지 저로써는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길지 않아 읽는 부담도 없습니다. 바쁜 일상 중에 맛있는 음식을 딱 배부를 만큼 먹고 금방 일어나는 장면이 떠오르는 느낌적인 느낌 말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오랜 경찰 생활을 하다가 접고 '탐정 비슷한 것'으로 연명하는 스타일이라 등장 인물의 행동에 제약이 따릅니다.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이 범위가 훨씬 넓지요. 조직이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조사에 이용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주인공이 '탐정 비슷한 것'인 경우는 경찰과 대립도 생기고, 이용하기도 하면서 유도리있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에드 맥베인의 "97분서 시리즈"와 많이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미국 작가이고 시기도 비슷하기도 하다보니 아무래도 비슷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드 맥베인이 1926년 생이니까 로랜스 블록보다 12살 형이네요. 자연히 87분서 시리즈가 떠오르면서 아직 못 읽어본 시리즈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지 않고 딱 필요한 이야기만 정제한 듯한 깔끔함과 담백함이 일품입니다. 막 엄청나게 극적이고 자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큰 장점인데, 장르물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약간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3. 살인과 복수가 난무하지만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의 매력

 

   로랜스 블록의 특징일지 어떨지는 앞으로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살인과 창조의 시간]을 통해 나타는 바로는 이야기 자체는 이중적인 매력이 있어 아주 좋았습니다. 만약 제가 이런 이야기 골격을 가지고 글을 써보라고 한다면 사건의 전개와 해결을 중심으로 막 이어나가겠지요. 하지만 명작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 작품속에는 주인공의 감상, 고뇌, 독백 등을 통해 이런저런 인간사의 다양한 단면을 끄집어 내 줍니다. 그 뿐 아니라 경찰조직이나 탐정 생활 등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나름 통용되는 속성이나 원칙 등에 대해서도 촘촘히 설명해주고 있어 '음~~ 그렇군' 하고 음미할 꺼리들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처음 만난 로랜스 블록의 [살인과 창조의 시간]은 제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여러가지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이 양반 작품의 세계가 무척이나 궁금해졌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사모아 봐....... 아니 읽어봐야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리암 니슨 형님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툼스톤]이 로랜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하니 원작도 찾아보고 영화도 봐야겠습니다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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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나라 쿠파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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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어디선가에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이 잘 섞여 있는 묘한 매력의 이야기

   소설에 대한 저의 짧은 식견과 경험에 '이사카 코타로'라는 이름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사신의 7일]이 출간되면서 아내가 관심을 보이는 바람애 덩달아 기존작 [사신치바]를 비롯 [골든 슬럼버]까지 책만 모아놓고 '읽어봐야겠다'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뜻하지 않게 [밤의 나라 쿠파]를 통해 이 작가를 먼저 접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아는바는 없지만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독특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뜨거운 반응을 받아왔다' 뭐 이정도로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

   [밤의 나라 쿠파]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나 '독특하다'였습니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이거 이거 독자라면 누구라도 금새 눈치챌 만큼 익숙한 이야기들을 차용해 그야말로 능청스럽게 접붙여 놓았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연하게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우화스럽습니다. 아니 뭐 우화라고 해야될 것 같습니다. 고양이 세계가 나오고, 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다 나무가 돌아댕기는 설정까지 있으니 '우화'가 아니라면 이상할 지경이죠.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리버 여행기도 슬쩍 끼어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대담한 구성이 위화감이 전혀 없이 읽힌다는 것에서 작가가 얼마나 능청스러운지, 창조적 능력 혹은 작가적 역량이랄까? 그 탁월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밤의 나라 쿠파] 한 권으로도 충분히 맞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어색하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다니 감탄할 수 밖에요. 심지어 저는 이런 류의 이야기가 취향에 그다지 맞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거참, 묘한 매력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2. 지배 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 그 해결되지 않는 부조리를 말하다.

   한 편의 이야기 속에 인간사의 변하지 않는, 바꾸기 어려운 부조리에 대해 은유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지배 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 간의 원초적인 속성, 인식조차 못하고 저지르는 부당함에 대해 무척이나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재미있게도 정작 권력을 손에 넣은 입장이 되면 태초에 태어나면서부터 '내츄럴 본 권력자' 인냥 당연히 여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발상은 나의 권력 발현으로 인해 받게 되는 타인의 크나큰 피해에 대해서도 역시 당연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됩니다. 더우기 안타깝게도 당하는 피권력자 입장도 마치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부당함을 느끼는 방향보다는 원래 그러려니 하고 수긍하는 방향으로 적응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도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이겠죠.

   이 이야기의 주 무대인 "밤의 나라"의 주민들도 그들을 점령한 소수의 "철의 나라" 병사들 앞에 쉽사리 맞서지 못합니다. 가능한 내 문제가 아니라면 침묵하려 합니다. 이 와중에 이상적인 지도자처럼 추앙받고 신뢰받던 그들의 리더이자 권력자 칸토는 사실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온 국민을 희생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도 그저 아닌 듯이 잘 포장하고 있는 보잘것 없는 자질의 권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는 '밤의 나라'의 사정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인 듯 합니다.

   한편 늘 고양이에게 희생 당하는 존재인 쥐들은 우연한 계기, 즉 '멀리서 온 쥐'의 등장과 조언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고 급기야 고양이에게 당연시하던 가학적 태도를 바뀌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언듯 보면 새롭고도 의식있는 행동으로 보여집니다만 고양이 톰이 그것은 본능이고 약속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그렇다면 쥐들 중 일부를 내어줄테니 마음대로 하고 나머지(리더 쥐를 포함한)는 건들지 말아달라고 재차 협상합니다.

   저자는 이 우화같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나 쥐나(개나 소나 말이나 닭이나 어느놈 할 것 없이) 타자를 희생시켜 나의 안위를 확보하겠다는 이기적인 입장은 똑같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은유를 통한 사회고발이랄까? 뭐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바로 그거야. 누구든 자기보다 작은 존재에 관해서는 의식이 흐려지기 마련인지도 몰라. 배짱을 부리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도 너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며 살고 있는거 아닐까."p217~8 

   이 짧은 상황속에서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약자가 한편으로는 또 강자가 되는 갈등의 역학에 대해 치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쥐들이 고양이들의 부당한 공격에 의한 동족 쥐들의 죽음을 막고자, 고양이와 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덫을 만드는 식물을 뽑는 과정에서 벌레의 집을 부서뜨리고 그로 인해 원래 쉬어야만 하는 잠복기에 벌레들이 이례적으로 나돌아 다니게 됩니다. 벌레 입장에서는 바로 그 쥐들이 쥐들에게는 고양이가, 고양이들 입장에서는 인간이, 인간 입장에서는 큰 나무 쿠파가 그들을 위협하는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인간들의 위협인 큰 나무 쿠파는 심지어 인간들의 지도자가 만들어낸 지배장치에 지나지 않기까지 하죠. 흥미로운 이야기속에 실로 무서운 이야기들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3. 현실은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아, 그래도 우리가 딛고 살아야만 하는 곳이지...

   믿고 있던 부인에게 팽당한 주인공은 그야말로 평범한 공무원입니다. 저도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기는 하다보니 제 입으로 할 말인가 싶기는 하지만, 과연 오늘날 평범한 공무원이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평범을 넘어 부러운 존재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주인공 설정이라면 일용직이거나 계약직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뭐 이런 저런 좀더 어려운 환경의 주인공이어야 하지 않나.. 그래야 작금의 현실사회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공의 직업이 뭔가가 중요한 설정은 아니므로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인간'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면 뜬금없이 배를 타고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나라에서 휘말리는 이야기는 마치 현실속의 강한 충격과 좌절을 맛 본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취할 수 있는 현실도피적 태도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좀더 실용적으로 보면, 게임이나 영상 등의 가상세계에 빠져있는 태도나 더 나아가 책 읽기에 집착하는 것도 큰틀에서는 현실도피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는 현실이 행복한 쪽에 훨씬 가깝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행이도 현대는 우리가 현실을 회피하기에 좋은 다양한 수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을 직면하기를 피하고 있기도 하고, 현실과 이상을 왔다갔다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것도 같습니다만 이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조금 위험합니다.

"나는 밤이 되면 혼자 위를 향하고 누워서 드넓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을 만끽했다." p518

"구멍을 파든, 물건을 들어 올리든 "대단해. 대단해." 하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의지하는 바람에 나도 썩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중략) 아이들로부터 듣는 칭찬이 기쁘기도 했다." p519

"갑자기 톰이 "이걸 타면 돌아갈 수 있지 않아?"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라는 선택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구나. 돌아가는 길도 있구나."하고 중얼거렸다.(중략) 나는 돌아갈 나의 집을 떠올려 봤다. 가족에 관한 생각은 한동안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중략) 정신을 놓지 않도록 뇌가 잊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p525

   아무리 여행이 즐겁고 여행지가 아름다워 만족스러워도 우리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떠나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렵고 집에서의 일상생활은 더욱 힘겨워 질 수 있습니다. 적당히 나갔다가 적당히 돌아오는 것.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 삶의 터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참, 재미없기도 합니다. 바람핀 아내에게 돌아가는 주인공에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신기한 경험을 통해 내면의 변화가 약간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으나 없으나 신비로운 모험을 떠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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