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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평점 :
정보라 작가의 <처단>은 12.3 '불법 비상계엄이 만약 성공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으로 시작한 소설입니다. 사실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역사 속에 빗대어 볼 사건과 현상들이 많아서 익숙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상상력의 결과라기 보다 지극히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 이야기를 대놓고 썼다고?'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출간 시점도 절묘합니다. 바쁜 각자의 일상으로 충격이 희미해지는 시점인 지금 즈음이 적기인 것 같기는 합니다. 당시 국회의원 한 인간이 1년만 지나면 다 잊는다는 망언을 하지 않았던가요? 이 소설을 통해 만약 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끔찍한 평행 현실을 마주하면서 절대 잊지 말고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이 더욱 실감 나게 와닿는 이유는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들이 면면 때문입니다. 국가 공권력이 파괴되고 군 병력이 동원되어 개인과 사회를 무차별로 짓밟는 상황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인물들은 동성 부부와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의료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 및 의료종사자, 귀화한 외국인과 국가적 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 등입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국가에서 보호받고 배려 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할 국민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나아가기에 수많은 문제와 과제를 안고 있지만 그래도 점진적으로 조금씩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내는 구조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랜 시간 인고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체제를 일순간에 뒤흔드는 비상계엄은 이 모든 토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됩니다.
처단은 이 엄혹한 현실을 담담하지만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아무리 권력이 시킨다 해도 말단 군인들이 배운 것이 있는데 소설처럼 막무가내로 총질을 해댈까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해서 본능적으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래도 되는 상황이 주어지면 무섭게 냉혹해지는 일은 역사 속에 허다하게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반박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힘들게 이어온 우리의 일상은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그저 생존을 위한 몸부림 만이 남는 아비규환이 펼쳐집니다. 포고문 내용을 순서대로 보여주면서 관련된 사례의 사건이 펼쳐집니다. 이 구성은 다시금 포고문의 내용을 되새기고 얼마나 어이없는 내용인지 확인하게 합니다. 포고문 어느 항목도 그냥 제멋대로 하겠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누구를 막론하고 대들거나 항의하거나 눈에 띄기만 해도 총질을 당하고 끌려가 고문을 받습니다. 인간을 수거하겠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인간이 수장이 되는 세상이니 이는 오지 않았을 뿐, 올 뻔했던 엄연한 현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만약 정말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은 개개의 군인들, 계엄군에 속한 그들은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며 인간 백정 같은 짓을 그냥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일반 시민들은 총탄의 탄압 아래 고개 숙인 채 도망만 다닐 것인가?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든 세력을 모으고 조직적으로 자유를 찾으려는 노력을 실질적으로 해 나갔을 것 같습니다. <처단>은 모의 사고실험을 제공해 이런저런 질문과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소설입니다.
바쁜 일상으로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날의 기억과 인식을 그 당시보다 더 높게 끌어올리는 자극제가 됩니다. 정보라 작가의 신간 <처단>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와 삶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