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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의 밤 -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을 암살하고자 했던 히틀러의 극비 작전
하워드 블룸 지음,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1월
평점 :
1943년 11월 28일 이란 테헤란에서 세계사에 남을 빅 이벤트가 열렸다. 이른바 연합국의 '빅3', 즉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틀 전에는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회담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를 껄끄럽게 여기던 스탈린은 카이로에 오기를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위한 별도의 모임을 가져야 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굳이 수도를 떠나서 세 사람이 모인 것은 단순히 친분을 쌓거나 히틀러가 흔히 그러했듯 우리편의 승리를 의심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동맹국 지도자들을 억지로 끌어다가 알맹이 없는 연설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제2전선의 구축과 함께 나치에게 이긴 뒤 전후 구상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서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는 얘기였다. 여전히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연합군이었다. 1943년 초 독일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완패했다. 여름에는 독일 최후의 전략적 공세였던 치타텔 작전이 소련군의 방어선 앞에서 가로막혔다. 그 사이 서방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무솔리니 정권을 끝장냈다. 히틀러의 운명도 초읽기였다.
테헤란 회담이 열릴 때부터 독일 항복까지 연합군의 공세. 1943년 말에 오면 나치가 완전히 수세에 내몰리면서 사실상 승패는 결정난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나치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느냐의 싸움이었다.
히틀러가 제아무리 장군들을 닥달한들, 이제와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빅3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면 과연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다했을까. 히틀러같은 모사꾼이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나폴레옹을 저격하겠다는 병사를 향해 "장군들은 서로를 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라면서 기사도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했던 웰링턴마냥 물렁하게 굴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빅3가 모이는 장소는 워싱턴도, 런던도, 모스크바도 아니었다. 연합국의 심장부와는 거리가 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었다.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가 192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이름이 바뀐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이 독일 편에 서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카운터넌스 작전(Operation Countenance)'을 발동하고 무력 침공했다. 이란군은 9개 사단 20만명에 달했지만 훈련과 무장이 빈약한 오합지졸이었던 이들로서는 압도적인 영국, 소련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변변한 저항도 못해본 채 무너졌고 6일 만에 정복당했다.
이란 침공 당시 소련군 BA-10M 장갑차와 영국군 수송차량 행렬.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양국 군대의 유일한 연합작전이었다.
반년 뒤인 1942년 1월 29일 영국, 소련은 전쟁이 끝나고 6개월 내에 이란에서의 철수를 약속했다. 1943년 9월 9일에는 이란 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명목상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실제로 이란군이 추축군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빅3 입장에서 이란은 여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란인들은 침략자들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고 독일 스파이들은 이란에 침투하여 연합국에 대한 무장 저항을 선동하면서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게다가 경제적 어려움과 식량난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독일군 해외방첩국 아프베어(Abwehr)는 1943년 여름에 튀르크계열의 유목민인 카슈카이족을 이용하여 서방의 대소 랜드리스 수송을 방해하는 계획을 시도했다. 작전명은 '프랑수아(Operation François)'였고 지휘 책임자는 얼마 뒤 무솔리니 구출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오토 스코르체니(Otto Scorzeny) 소령이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무장친위대 소속 제502저격대대 소속의 정예요원 몇명을 뽑아서 선발대로 이란에 보냈지만 낙하 도중에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모조리 일망타진당했다.
그리고 더욱 야심찬 시도가 빅3 암살 계획이었던 '멀리뛰기 작전(Operation Long Jump)'이었다. 친위대의 2인자이자 힘러의 라이벌이기도 한 에른스트 칼덴부르너(Ernst Kaltenbrunner)는 빅3가 모이는 장소가 테헤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히틀러는 철천지 원수와 같은 세 지도자를 한방에 몰살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작전 역시 스코르체니가 맡았다.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전쟁 이전에도 언제나 쿠데타나 암살 위험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스탈린이야 크렘린 궁전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니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서방 지도자들은 훨씬 덜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미국 한복판에서 자기네 대통령을 몇번이나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충분한 인력과 자금도 없이 말이다. 1933년에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루스벨트를 거의 살해할 뻔 했던 사람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라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벽돌공이었다.
만약 빅3 중의 한 사람이라도 암살에 성공한다면 당장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연합국의 결속을 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모처럼 독일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연합국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정말로 성공했다면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겠지만, 결론만 말하면 이번에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테헤란의 독일 첩보망과 스코르제니가 보낸 특수부대는 소련 NKVD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는데 실패했고 빅3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달을 일 없이 테헤란의 소련 대사관에서 화기애애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히틀러가 두번 다시 그런 시도를 벌이는 일 또한 없었다. 다음 회담은 1년 뒤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열렸고 그 때쯤이면 독일은 베를린 코앞까지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트형 주연의 영화 <바스터즈> 이쪽은 연합군이 히틀러 암살부대를 보낸다는 내용.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양측이 서로의 지도자나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보안이 워낙 철통같다보니 소위 '참수작전'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효과는 적에게 겁을 줄 수는 있다는 심리적인 것에 있다. 우리나 중국이 참수작전을 숨기는 대신 대놓고 떠드는 것도 이 때문.
이것이 러시아인들이 주장하는 소위 "빅3 암살미수사건"의 전모이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소재이지만 막상 서구 쪽에서는 믿지 않는다고. "우리가 너희를 구했다"라는 러시아인들의 일방적인 주장 이외에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이다. 스코르체니는 그런 작전에 관여하기는 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면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작전"이라고 일축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영원히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암살자의 밤(원저 : Night of the Assassins)>은 제2차 세계대전의 히든 스토리이자 나치판 바스터즈가 될 뻔한 멀리뛰기 작전의 전모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블룸(Howard Blum)는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퓰리처 상에 두번이나 노미네이트했다는데 수상은 못 한 모양. 또한 논픽션 역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그 중에서도 이 책은 2020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작.
이 분. 1948년생이라고 하니 올해로 75살. 아직 정정하신 듯. 저서로 볼 때 주로 다루는 분야는 제2차 세계대전과 범죄, 스파이물.
이 책은 테헤란 회담이 열리기 반년 전인 1943년 6월 포르투칼의 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총리이자 철권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가 통치하는 포르투칼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명목상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랜 친영 국가로서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연합국을 물밑에서 지원했고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이곳을 통해서 나치 치하의 유럽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있다. 빅3 중에서 최고령자로서 일흔을 앞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전쟁 내내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쉬지 않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처칠은 몇 번이나 포르투갈을 은밀하게 방문했고 살라자르를 면담하여 연합국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물론 포르투갈에는 독일 스파이들이 득실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런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 건 도박이었다. 어느날 독일 스파이는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런던행 미제 더글라스 DC-3 여객기에 거물이 탄다는 정보를 알아냈고 그 거물이 처칠임을 알아낸다. 독일 공군의 Ju-88 중전투기들이 즉각 출동하여 그 불운한 비행기를 격추시키지만 독일군을 따돌리기 위한 눈속임이었고 그 사이 처칠은 다른 비행기를 타고 잽싸게 무사히 빠져나옴으로서 독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물론 독일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선다. 어차피 궁지에 내몰린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은 머리가 셋 달린 괴물과 같았다.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은 사무실에서 동료 스파이들과 나눈 대회에서 연합국을 '히드라'에 비유했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사려깊게도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말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그 짐승의 머리를 모두 잘라낸 후에야 죽이는데 성공했다고 말이다. - p.24 |
그 순간 갑자기 군중의 깊은 틈새에서 칼이 날아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이 대통령의 가슴으로 직행했다. 루스벨트는 칼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다리는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이크가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군중 사이에 서서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p.36 |
루스벨트는 전시든 아니든 백악관의 일이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악관의 일이란 정치이므로 공무원들이 백악관 복도를 수시로 들락날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2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에는 백악관 문이 활짝 열리고 나무에 불을 밝히는 행사에 군중이 몰려든다는 것을 의미했다.추축국 요원이나 무장 단체 대원이 수많은 낯선 이들 가운데에 껴서 보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이크를 초조하게 했다. - p.53 |
빅3의 만남이라니! 셀렌베르크는 이것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3인의 표적을 노릴 수도 있는 매력적인 기회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이들의 죽음이 전쟁의 최종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가장 열렬한 나치들 - 히틀러나 괴벨스 - 이었다. 독일의 패배는 암울하지만 확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사라진다면 다른 평화가 있을 수 있었다. - p.72 |
셀렌베르크는 평소답지 않게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그것은 단순히 장거리 작전이 아니라고 맞섰다. 훨씬 더 야심찬 작전이라고. 이것은 멀리뛰기와 같다고. 결국 그가 주장한 이름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연합국 지도자 3명을 암살하려는 작전은 공식적으로 '롱 점프'라고 불리게 되었다. - p.139 |
이번 전쟁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중대한 특공대 작전은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전사다운 방법으로 적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최후의 순간에 오토 스코르체니가 자신들을 끝장내러 왔다는 것을 꼭 알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죽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폭탄이 필요했다. - p.200 |
나치가 처음 빅3암살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테헤란 회담까지 약 반년의 시간 동안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4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드라마틱하게 풀어쓰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리는 스코르체니가 침투시킨 독일 특수부대와 이들을 막기 위한 연합군 첩보부대간의 추적과 대결은 그야말로 한편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같은 느낌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냉전 이후 기밀 해제된 구 소련의 정보 문서와 미국 OSS, CIA, FBI, 영국 정보부 보고서, 개인 회고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상당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마지막에서 KGB 제1총국장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전 세계 어떤 정보기관도 마지막 문서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얘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과 연합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지만 막상 적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부대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전시에 적진 한가운데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적의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동이 조금만 수상해도 대번에 체포될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독일 특수부대가 대서양을 넘어서 미국 본토에 침투한 유일한 사례는 1942년 6월 파스토리우스 작전(Operation Pastorius)이었다. 그나마도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상륙하자말자 모조리 체포되어 간첩죄로 전기 의자행이 되었다. 하물며 히틀러와 스탈린처럼 평소 남의 원한을 많이 산 인간들일수록 결벽에 가까울 만큼 경계심이 철저한 법이다. 나치 킬러를 자처하는 몇몇 미친 또라이들이 히틀러를 제거한다는 <바스터즈>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스토리이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블랙 코메디이니. 히틀러가 거의 죽을 뻔했던 순간은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 장교들이 설치했던 폭탄이 터졌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멀리뛰기 작전이 실존했고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멀리뛰기 작전이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1943년에 죽었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불과 1년여 뒤에 뇌출혈로 사망하는 루스벨트의 수명이 좀 더 짧았을 수도 있고, 스탈린이 과로사했을 수도 있으며 처칠이 비행기 추락으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루스벨트가 1945년 4월에 죽었을 때 히틀러는 미친 듯이 기뻐했지만 전쟁의 전환점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하지만 1943년이었다면 얘기는 다를 수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리스(Henry Agard Wallace)가 과연 전시 체제에서 루스벨트에 비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미국인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인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나름의 추진력은 있었지만 정적이 많았다. 더욱이 루스벨트 이상으로 소련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는 보수파들의 반감을 사서 국론을 분열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처칠이 죽었다고 해서 독일에게 지독하게 두들겨 맞은 영국이 히틀러에게 유화적으로 바뀔 리는 없겠지만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했던 서방과 소련이 힘을 모으는데에는 처칠의 외교술이 컸다. 스탈린의 죽음은 확실히 소련 지도부를 대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공산 독재국가인 소련은 영국과 달리 제아무리 나치가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어도 그 원한을 풀기보다 지도자들끼리 권력 투쟁에 열을 올릴 나라였다. 실제로 1917년에 레닌은 국내의 동포들과 싸우기 위해서 독일에게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포기한 바 있었다. 언제나 인민보다 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또 한번 그 짓을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히틀러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세 사람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불운은 하필이면 이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일까. 애초에 미대에 합격했으면 온 세상이 조용했을 것이고 히틀러도 제 손으로 자기 머리에 총알 박을 일은 없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