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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후생에 대한 이야기보다 뒷편에 실린 옮긴이 최준식의 논문,
'한국인의 죽음관-내세관의 형성을 중심으로'가 더 볼만 했던 것 같다.
이 논문을 읽고 '제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조상의 넋을 기리는 일은 후세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그 방법중의 하나가 제사라 여겼다.
제사상에 절도 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원칙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한 모든 종교는 사람에 우선할
수 없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고 보니 방법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사는 유교문화에서 온 것인데 우리는 대부분 불교에서 그 시작점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유교문화에서는 죽음을 슬프고 비통하고 아픈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장례문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로스박사와는 상당히 다른 시각이다.
그녀는 사후생을 편안하고 안락하며 아름다운 것이라 설명한다. 죽음은 결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올바르고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모두가 사랑으로
한마음이 될 것을 강조한다.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암환자들은 차라리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
몇 권의 그녀의 책들로 인해 분명 죽음에 대한 나의 시각은 달라졌다. 편안하게...
그녀에게 감사한다. 사랑으로...사랑으로...
*상징적으로 비유하자면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만 가지 일들이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단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선 안된다.
*지식은 도움이 되지만 지식 자체만으로는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머리나 가슴,
영혼을 쓰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도울 수 없다. 이것은 절망적인 만성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은 죽어가는 환자들이다.
*당신이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 혹은 직장을 잃었을 때, 또 50년 동안 살아왔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어 양로원으로 가야 할 때, 사랑하던 앵무새를 잃어버렸을 때, 지독하게 시력이 나쁜 어린이가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죽음의 단계'를 경험한다. 이것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이다.
*당신이 병에 걸리고 고통 속에 삐지며 상실을 경험할 때, 위험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을 재앙이나 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당신에게 내려진 선물로 받아
들이게 된다면, 당신은 성숙할 것이다.
*죽음은 단지 이 삶으로부터 고통과 고뇌가 없는 다른 존재로의 변화일 뿐이다. 모든 아픔과
부조화는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단 한 가지는 '사랑'이다.
-한국인의 죽음관(최준식) 中에서
*그들은(유교도) 제사를 지낼 때에만 조상령이 찾아 온다고 생각할 뿐 그 조상령이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다 1년에 몇 안 되는 제삿날을 알고 찾아오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에 제사 지내는 현재의 시점, 즉 제사의 절차라든가 음식을 음복함으로써 조상들로부터
복을 받겠다는 생각에 더 집중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다시 조상들은
잊혀지고 자손들은 자신들의 현재 삶에만 몰두하게 된다.
유교가 견지하는 생사관이 얼마나 현세 중심적인가를 알려면 제사보다 장례 절차를 보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 이른바 고복(皐復)이라는 것으로 망자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다.
가는 사람을 저승으로 편하게 잘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이승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가는 저쪽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고 여기서 살아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 돌아오라고 하소연
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해서 장례식이 시작되면 곧 사잣상 혹은 사잣밥이 차려진다.
이것은 가는 사람을 배려한 것으로, 인간의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저승사자들
이 와서 붙잡아가는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가는 혼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데려가라고 저승
사자들에게 일종의 뇌물을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밥, 술, 돈, 짚신 등이 놓이는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간장이 놓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저승사자가 간장을 물인 줄 잘못 알고 들이키게 되면 망자의 혼을 끌고저승 가는 길에
목이 자꾸 말라 이승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매우 순진한 발상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죽음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기때문에 부모가 노환으로 자연사를 해도 자식은 죄인
으로 간주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죄인처럼 옷을 입어야 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삼베로 만든
거친 옷을 입어야 했으며 이옷도 죄인의 옷처럼 단추를 풀어야 했다.
(...) 상엿소리 가운데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현세 중심주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구절들이 있다.
'한번 아차 죽어지니 저승길이 분명하데이. 대궐 같은 집을 두고 나의 갈 길 찾아가네. 이제 가면
언제 오노 한번 오기 어려워라', '저승길이 멀다 해도 문전 앞이 저승이데이'하는 것은 지극히
현세 중심적인 태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경제 사정으로 보면 일반 민중들이 살았던
집이란 매우 누추하기 짝이 없었을 터인데 그것을 궁궐이라고 표현한 것부터가 그렇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저승이 어찌 생겼든 그곳은 무조건 나쁜 곳이고 이승이 훨씬 더 좋다
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승으로 오는 것을 매우 힘든 일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렇다.
가기 싫은 곳을 가긴 가는데 언제 돌아올지 어떤 기약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승길은 무조건
가기 싫은 것이다.
*(...) 한국인들은 저승에 대해 아주 희박하거나 막연한 생각만을 가질 뿐이다. 아니면 아예 저승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한국인들이 좋아했던 속담 가운데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느니 '거꾸로 메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느니 '죽은 정승이 산 개
만 못하다'느니 하는 속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현세에
만 향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