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완간 개정판 4.5.6 - 만인보 완간 개정판 전집 2
고은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차르트 같은 천재들은 곡을 열심히 만들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그 곡을 내려주는 것이라 

이르더라. 곡을 만들려고 머리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저절로 떠오른다는 것이

다. 다만 그는 떠오르는대로 적기만 할 뿐, 그것조차 떠오르는 것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

어 받아 적게 했다는 홍승찬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이 그러하다. 사람, 사람들에 대한 글을 적기 위해서 고은이 갖가지 말들을 조합해

보고, 굴려보고, 짜집기해 보고, 지워보다가 다시 적어보다가... 그렇게 한 편의 시에 각고의

노고를 더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정녕 그것이 아니라 그는 떠오르는대로 다만 적어 나가기

만 했을 것 같다는, 하늘이, 우주가 일러주는대로 다만 적기만 했을 것이라는, 그래서 그는 

천부적일거라는, 천재라는 생각이 그의 시를 대하면 늘 들듯, 여기서도 어김없다.

책 뒤편에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인명 찾아보기'가 있다. 세상에나! 어찌 이것이 시집이던가! 

단편소설집이지! 암, 소설집이고 말고!

"옥순, 칠룡, 용섭 어머니, 미제 분임, 어린 기섭, 전대복, 옥정골 고남곤......"이라 하지 않았다.

"옥순이, 칠룡이, 용섭이 어머니, 미제 분임이, 어린 기섭이, 전대복이, 옥정골 고남곤이......"라 

 

했다. 서민 냄새 사람 냄새 물씬물씬 난다. 


"침 뱉어 / 손 안에 기운 쥐고 있었다."

"곧 가야금 산조가 흥건했다."

"꼬끼오 하고 / 어둔 하늘하고 / 어둔 땅하고 갈라놓는 / 닭 울음소리"

"긴 빨래줄에 / 빨래 가득 널어 / 빨래장대 솟아올리는 기쁨 넘치며 / 
기어이 그 기쁨 노래 되어 / 낭랑하여라"

어려운 말도, 모르는 단어도 없다. 은유 많은 시만큼 골치 아픈게 또 있을까?

그럼에도 가슴 울리고, 감동 주고, 눈물을 주기도 하는 것이 <만인보>이구나.

온통 사람의 이야기 뿐이니 위로가 따로 없고, 위안이 따로 없다. 

"남의 곤한 아침잠부터 망치는 달봉이 / 이런 사람도 / 이 세상 살 까닭 있어 /
결코 약해지지 않고 살아간다 / 미제 달봉이 살아간다"

 

저렇게 악질인 사람도 살아가니 우리네도 살아가야지, 암, 살아가야하고 말고지.

이러한 책으로 30번까지라니, 만인보를 다 읽고 나면 지나가는 아무라도 사람이기에 그저 

 

반갑고, 고맙고, 미소쯤은 절로 줄 수 있을것 같다.

"이 땅 위의 물과 불이 언제나 굽실거리며 어질덤벙이었다"


"그년 시집 동네 사람들 / 얼마나 끕끕수 받아야 할까"

 

"그럴 때면 꼭 이웃에 말주비 있다"

 

"이주걱부려 쌓는다"

 

"해읍스름하게 흐린 날 / 심심찮다"

 

"한달가웃도 앓는데"

 

"꺼먹조끼, 꺼먹바지, 꺼먹고무신"

 

어질덤벙, 끕끕수, 말주비, 이주걱, 해읍스름, 한달가웃, 꺼먹, 등등 처음 보는 단어들도 더러

 

있어 어찌나 반갑다.

 

모르는 단어가 어찌 이리 반가운지 나도 잘 몰라! 하여간 반갑고 재밌다.

 

춘원 이광수가 시가 되어 있다. 그 빈정거림이 가히 후련하다.

 

양녕대군, 홍대용, 이몽학, 김춘추와 김유신, 황희, 도선 등등, 역사 속의 인물들이 시가 되어

 

있으니 이 또한 '고은'만의 매력이 아닐런가!

 

 

"여기서 도선은 고려의 국승 신승으로 받들어지나니

고려 불교 풍수로 돌아가고

그뒤의 조선도 유교 명단으로 돌아가매

이 어찌 딱한 자들의 수작인가

그저 뒤에 산 있고

앞에 흐르는 것 두면 되었지

어찌 그리 이 땅의 산수 귀하지 않은 데 없거늘

어디는 길하고 어디는 흉하더냐

 

왕건 이르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지으면

지덕 손상시키고

따라서 내 왕조 오래가지 못하리라

 

이런 말이나 하늘같이 믿어 마지않아

이 땅은

도선 풍수지리에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땅을 자유케 하라

사람이여 거기 비로소

먼저 네 땅을 자유케 하라

그 어디도 거룩하지 않은 곳 없는 땅으로부터

사람이여 거기 비로소

너 스스로 자유케 하라"     <도선 中에서>

 

 

그저 뒤에 산 있고 앞에 흐르는 것 두면 되었지...

이땅의 산수 귀하지 않은 데 없거늘...

 

이로써 나는 풍수지리에 대한 그간의 고정된 관념도 허물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류시화 책들은 한결같이 제목이 근사하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백 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등등...

 

그리고 이 책,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흐아~ 아름답다.

 

인터넷서 떠도는 영혼없는, 말만 잘 엮어서 만든 듯한 글들은 그닥 즐기지 않는 편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살짝, 떠도는 그런 글들 부류인가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책의 마지막에

 

곁들인 류시화의 글이 이런 마음을 싹~ 덮어주었다.

 

그가 애송하는 이 책에 실린 잠언시들보다 나는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그의 글이 훨씬 더 재미

 

졌다.

 

 

"겨울 내내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하고 방안에 누워 시름시름 앓던 나는,

어느 날 방문의 열고 바깥을 내다 보았는데 봄빛이 완연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가

화단의 흙을 살살 파보았더니

연초록 싹들이 흙을 밀치며 일제히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엎드려 '봄'에 대한 시를 썼다.

그리고 곧 병이 나았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 온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어들은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 쓰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영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상 애초의 싹부터 시인이었던가 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8-18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선의 나침반
숭산 지음,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 김영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온전히 현각스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숭산 지음, 현각 엮음"이었다.

 

숭산스님이 교사였다면 분명 일목요연 아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싶다.

 

불교의 목적 :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불교의 분류 :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禪)불교

불교의 구성 : 불(佛), 법(法), 승(僧)

 

불교의 목적, 분류, 구성이라는 큰 테두리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각각 부분으로의 세부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상당히 훌륭한 교과서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일까?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왜 더욱더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양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수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동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도구들이 나오기 시작햇다.

수백, 수천만 동물들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세계에서 매일

도살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갖고있으므로 섞여 있으면 좋지 않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살지,

다은 종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

그들은 자기 종들끼리만 몰려 다니고

다른 종이 공격해 오면 떼거지로 반격한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 세계도 이와 비슷해지고 있다.

(...)

자기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에는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프다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몸은 비록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의식의 일부는 이미 동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툰 대신

고양이와는 아주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의 말머리에 나오는 이 글들을 보고 참으로 공감했다.

 

잔디조차 산 생물이라 밟지 못하며, 바퀴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육식을 아주

 

즐긴다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때로 자신의 가치관들이 추호의 의심없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지만, 다른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숭산 스님과 현각 스님을 보며,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란 생각에,

 

그 스승을 따라 들어 온 나라를 등져야 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싶어 무척 안타깝지만,

 

현각 스님께 훌륭한 스승이 계시었 듯, 그 또한 어디서든 훌륭한 스승으로 자리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 책을 기분 좋게 덮는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써 '오직 모를 뿐..

....'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 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소승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이 덧없는 고통의 바다임을 먼저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그 고통의 세계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일단 생각이 일어나면 삶과 죽음

이라는 상대적 세계가 나온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끊어 상대적 세계에서 영원

불멸의 절대적 세계, 즉 열반을 얻어야 한다.

(...) 이에 비해 대승불교는 공(空), 즉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

끝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시작한다.  소승불교가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공,

열반의 세계에서 끝난다면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종착점인 공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 대승불교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보고 그런

다음 이생에서 다음 생, 또 다음 생, ..... 계속 삶을 이어가는 동안 어떻게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도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순간순간 내 삶은 오로지

중생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선(禪)불교는 무엇인가?

선은 결코 절대니, 상대니 하는 것을 운운하지 않는다. 허무의 세계니. 진리의 세계니, 완전한

세계니 하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선 수행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직접적으

로 마음을 탐구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을 통한 배움에 강조

를 두지 않는다. 단지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선 수행은 바로 이 순간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선의 가르침은 항상

우리가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르는 곳으로 돌아온다. 한 순간이 전부이다. 한 순

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탕!(죽비 치는 소리)>

 

*진정한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사마디',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 다시 말해 불은 순수한 마음이고, 법은 맑은 마음이며, 승은 순간

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

(一切三寶)라고 부른다. (...) 맑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 이것이 '평상심'이다.

 

*불교는 어떤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도 공하다.

'원죄'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돈이 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쫓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에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정업(正業)'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正命),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참된 수행, 다시 말해 정정(正定)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변한다. (...)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

과 마음의 모든 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 번

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 참 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빵을 주면 된다. 단지 '......할' 뿐

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공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 단지 하나

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뭔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 하는 마음

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뭔가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100% 그냥 하는 것이다. 말은 중요

하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싶으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노력하는 마음이다. 오직 노력하고 실

천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인 금강경 해설을 생각했다면 의외의 해설임을 볼 수 있다.

 

우선 전체 32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금강경을 14분 까지의 해설로  마무리 한다.

 

소소한 해설 보다는 전체적인 의미에 더 치중하고자 함을 느꼈으며 그것은 결국 '자신을

 

믿으라.'는 그의 일침으로 마무리되는 듯 하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나의 바깥에,

저쪽 권위에,

성자들에게,

이른바 선지식들에게,

책 속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천만 경계하시라.

자기 안의 힘과 가치를 믿고 따르라. 

인간의 몸은 그 자연 속에 고유한 이성이 거주하고 있다.

그 소리에 다만 귀를 기울이면,

그 자성(自性)이 스스로 길을 열어갈 것이다.

방하(放下),

즉 놓아줄 때 일은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억한다.>

 

 

<금강경>을 제대로 아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겠으나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마지막

 

충고가 무척 훌륭하여 내가 이 경(經)을 공부하는 이유로 아주 합당해 보인다.

 

<언성을 높이거나,

울컥하는 일이 있거나,

주먹이 올라가다가도,

돈을 따지거나,

명예를 계산할 때,

문득 '아상'이며,

'복덕'이며,

'마음의 항복'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이 떠오른다.

그 떠올림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어느덧 인격이 된다.

그 인격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경전의 사구게는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심원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금강경>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이 경전의 사구게 하나를 수지독송하는 공덕만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

 

"장로 수보리"라는 단어를 금강경에서 처음 보고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그것에 대한 어원의 풀이가 있어 궁금하던 부분이 해소 되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읽을 때도 다소 산만했었는데, 그 이유를 나의 집중력 탓이라 여겼

 

는데, 이 책도 그러하다. 읽다가 생각이 자꾸만 따로 흘러가버려 끝까지 다 읽는데 애를

 

먹었다.

 

저자는 분명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분 같은데 내가 그의 재치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요구가 많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서 말은 늘 위태롭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말이 적다. 그렇지 않은가.

 

*분별은 이 세계 전체의 고통을 산출하는 무지의 핵심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 경험 세계에 수반되는 모든 악은 잘못 된 구분에서 비롯된 생각이 구축한 것이다.

 

*제발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이 상습적 태도가 자기나 남에게 실은 가장 나쁜 독이기 쉽다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그러니 의존을 그치고, "절벽에서 그만 손을 놓아라!" 나머지는 불성이 자연 길을 인도할 것이

다. 이를 어느 시인은 "잊어버림으로써 기억한다"고 썼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 마음의 풍경이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웠던 사람들이다. 무의식에서

라도 신호가 왔기에 독자들은 절을 찾고, 명상을 하며, 또 이 허접한 글을 쫓고 있을 것이다.

그 발심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루어졌다.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절절한 계기와 절차를 거쳐

그리던 평화와 아타락시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란다.

 

*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 들지 말라. 그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행요전 - 개정판
한마음선원 출판부 엮음 / 한마음선원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신도들의 종교 생활을 다지기 위한 '신행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신행요전'의

 

'신행'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등이 한글 풀이와 함께 있으며, 예불의식, 선법가, 보왕삼매론등이

 

수록되어 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밀'의 한자를 이 책에서는 '密'로 되어 있지만 여타의 다른 책들에

 

서는 '蜜'로 되어 있으며, '열반' 또한 이 책에서는 '반'의 한자를 '般'으로 쓰고 있으나 다른 책들

 

에서는 '槃'으로 보았다. 별 차이가 없는지 궁금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