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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선의 나침반
숭산 지음,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 김영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온전히 현각스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숭산 지음, 현각 엮음"이었다.
숭산스님이 교사였다면 분명 일목요연 아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싶다.
불교의 목적 :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불교의 분류 :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禪)불교
불교의 구성 : 불(佛), 법(法), 승(僧)
불교의 목적, 분류, 구성이라는 큰 테두리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각각 부분으로의 세부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상당히 훌륭한 교과서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일까?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왜 더욱더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양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수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동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도구들이 나오기 시작햇다.
수백, 수천만 동물들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세계에서 매일
도살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갖고있으므로 섞여 있으면 좋지 않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살지,
다은 종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
그들은 자기 종들끼리만 몰려 다니고
다른 종이 공격해 오면 떼거지로 반격한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 세계도 이와 비슷해지고 있다.
(...)
자기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에는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프다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몸은 비록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의식의 일부는 이미 동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툰 대신
고양이와는 아주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의 말머리에 나오는 이 글들을 보고 참으로 공감했다.
잔디조차 산 생물이라 밟지 못하며, 바퀴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육식을 아주
즐긴다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때로 자신의 가치관들이 추호의 의심없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지만, 다른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숭산 스님과 현각 스님을 보며,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란 생각에,
그 스승을 따라 들어 온 나라를 등져야 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싶어 무척 안타깝지만,
현각 스님께 훌륭한 스승이 계시었 듯, 그 또한 어디서든 훌륭한 스승으로 자리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 책을 기분 좋게 덮는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써 '오직 모를 뿐..
....'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 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소승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이 덧없는 고통의 바다임을 먼저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그 고통의 세계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일단 생각이 일어나면 삶과 죽음
이라는 상대적 세계가 나온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끊어 상대적 세계에서 영원
불멸의 절대적 세계, 즉 열반을 얻어야 한다.
(...) 이에 비해 대승불교는 공(空), 즉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
끝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시작한다. 소승불교가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공,
열반의 세계에서 끝난다면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종착점인 공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 대승불교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보고 그런
다음 이생에서 다음 생, 또 다음 생, ..... 계속 삶을 이어가는 동안 어떻게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도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순간순간 내 삶은 오로지
중생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선(禪)불교는 무엇인가?
선은 결코 절대니, 상대니 하는 것을 운운하지 않는다. 허무의 세계니. 진리의 세계니, 완전한
세계니 하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선 수행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직접적으
로 마음을 탐구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을 통한 배움에 강조
를 두지 않는다. 단지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선 수행은 바로 이 순간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선의 가르침은 항상
우리가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르는 곳으로 돌아온다. 한 순간이 전부이다. 한 순
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탕!(죽비 치는 소리)>
*진정한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사마디',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 다시 말해 불은 순수한 마음이고, 법은 맑은 마음이며, 승은 순간
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
(一切三寶)라고 부른다. (...) 맑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 이것이 '평상심'이다.
*불교는 어떤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도 공하다.
'원죄'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돈이 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쫓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에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정업(正業)'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正命),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참된 수행, 다시 말해 정정(正定)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변한다. (...)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
과 마음의 모든 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 번
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 참 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빵을 주면 된다. 단지 '......할' 뿐
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공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 단지 하나
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뭔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 하는 마음
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뭔가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100% 그냥 하는 것이다. 말은 중요
하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싶으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노력하는 마음이다. 오직 노력하고 실
천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