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의 장편소설이 맞았다. 소설이라기보단 너무나 자전적이어서 책을 읽다가 표지를 다시

 

힐끗해보니 역시 장편소설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보인다.

 

오래 전 '싱아'를 '상아'로 착각해서 오래도록 그 많던 상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대출하고자 집 앞산을 넘어 도서관을 향하던 길에 같이 동행한 친구도

 

그렇게 제목을 읊조리던 것에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말이다.ㅋㅋ 

 

나의 정서의 대부분은 초등학교 6년의 방학을 내리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보낸 것에 연유한다.

 

그때의 추억이 내 어린시절의 전부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 12번의 방학들이 내게 준 것은

 

오직 '자연'이다. 그러해서 지금도 나는 어떻하면 다시 그 속으로 들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동경한 끝에 그 간절함이 허물어져가는 시골집의 방 한 칸을 전세로 얻을 운을 건졌다.

 

하하하~~~ 허물어져가면 갈수록 좋은게 시골집이다. 그래야 아궁이도 있고, 문창살도 있고,

 

창호지에 한지 도배까지 가능하니까! 따뜻한 봄이면 주인 어르신께서 공사를 하신다고 하니

 

제발 그렇게 되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박완서는 참 글도 잘쓴다. 내게 남아있는 그 어린시절의 모든 추억들과 섬세한 감성들이 그녀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그녀의 글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어린시절의 감성들까지

 

찾아지도록 한다. 그래서 더 찬란해지도록 만들어 준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이란 혹독한 시련과 그 공포를 겪지 않은 우리 세대가 얼마나 복받은

 

세대인지를 감사할 수 있었고, 전쟁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란 더욱 처참하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특히 여학생들은 화장실도 친구를 옆에 끼고 가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등하교때는 거의 서로의 팔짱을 끼고 움직이는 게 다반사였다. 그 속에서 가끔 나는 혼자여야

 

할 때가 있었고 그럴때면 뭔가 내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건 자신감 부족으로도 연결이 되어

 

위축되기가 일쑤였었는데 차라리 그때 박완서처럼 혼자를 즐기었다면, 혼자가 더 편한 사람이

 

었다면 나의 자존감이 그렇게 위축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많았다.

 

그저 모범생 그 자체로 지내 온, 선생님과 부모님이 금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로만

 

알았던 고지식한 나와는 상반되는 박완서의 모습이 그 시절, 내 동경의 대상이었던 듯 하다.ㅋㅋ

 

싱아와 달개비등은 나의 시골 할머니댁에서도 많이 보던 풀들이었다. 그때는 흔하디 흔해서

 

천스럽기까지 해 보이던 것이 요즘 이런 들풀들을 볼 때면 너무 청초하고 청아해서, 그 수수한

 

아름다움에 넋을 뺏기고 만다.ㅎㅎ

 

그 흔한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많던 싱아를 차라리 다 먹어져서 없어졌더라면...

 

그저 그 시절엔 도시화로, 지금은 서구화로, 빌어먹을 문명화로 지천에 놓여 있던 것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안타까움만 절절히 남아있을 뿐이다.

 

 

박완서의 책들을 몇몇 보면서 느낀 것은 내가 처음 접하는 한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한글들이 다 너무 이쁘고 좋아서 사전을 다시 뒤적이기도 해 보았다. 메모를 미처 해두지

 

못한 것이 아쉬워 지금부터 메모를 해두도록 마음 먹었다.

 

 

박완서는 마무리를 왜 여기까지로만 했을까? 결혼과 출산과 육아, 자녀교육등등 여자의 생은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을텐데 굳이 이 소설의 마무리를 20대 초반에서 끝을 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완서는 위에서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하고 말하고

있다. 이때 '우리'라는 말은 어머니와 오빠 가족과 작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서 그 '우

리'에게 덮친 수많은 '고약한 우연'들을 증언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자기 가족에게 덮친 그 끔찍

한 불운들을 증언하는 길만이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이며, 자신들이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홍정선의 작품해설' 중에서

 

자신들이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20대 초반까지만 필요했던가

 

보다라고 여기면서 박완서의 나머지 인생이야기를 기대해 보던 홍정선의 기원처럼 나도

 

이제사 다른 그녀의 책들을 섭렵해 보고자 한다. 찬란한 그녀가 그립다.

 

 

 

 

* 너희들이 온종일 답답한 골목에서 공기나 고무줄을 하다가 기껏 어른을 졸라 일 전씩 까먹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이 살아 숨쉬고 너울대는 들판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 것이다.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 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 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 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노느매기:물건 따위를 여러 몫으로 나눔. 또는 그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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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2-01-2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을 볼 때 간혹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본다.
모든 사람들이 빌려서 보는 책이거늘 자신의 마음만으로 줄을 친다는 것은 빌리는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