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마음공부 (보급판)
법상 지음 / 무한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대학교 때 어느날,

"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듣고는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암만 생각을 해봐도 나는 그냥 나더라.

'내가 나지 누구긴 누군가, 별 이상한 질문도 다 있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또렷하다.

 

지금은 그 질문을 '별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나, 본래성품, 불성이 도대체 나의 어디에 있을까를 궁금해한다.

머리에 있나, 가슴에 있나, 단전에 있나, 발바닥에 있나, 영혼에 있나, 우주에 있나,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누구는 보았구만 나는 못 보는 것일까?

본래 볼 것도 없는 것이어서 못 보는 것일까?

보고 싶다는 것에 집착하니 못 보는 것일까?

본다는 생각 없이 보는 것이라 본다는 願을 가지고는 못 보는 것일까?

我相이 있어 못 보는 것일까?

아상이 타파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 고요함은 어떤 느낌일까?

내가 없어야 전체를 가진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  

......

아니타 무르자니는 임사체험으로 본래 성품을 만났던데 나는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모를 때는 '별 이상한 질문'으로 간단히 치부하고 말았는데 알면 알수록 질문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더 강한 갈망이 일어난다, 수다원과를 얻고 싶은, 흐름에 든 자이고 싶은 강한 열망!!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그 어떤 법도 없다. 얻을 깨달음도 없으며, 얻을 주체인 '나' 또한 없다. 완전한 무아, 완전한 텅 빔, 완전한 공만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있다.

 

*'스님'은 어때야 한다고 고정 짓지 말라. (...) 어떤 틀에 갇힌 정형화된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란 '수행자다운' 어떤 틀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

 

* 스스로 '나'라는 허상만 만들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우리 마음도 이와 같다. 일상에서는 다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일반적일 때, 별 일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없다. 이거이 우리 모두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본래 우리의 최초는 텅 빈 무심이었고 무위였으며 無作이고 無主였다. 그러나 조건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독자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평상심은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조건이고 상황이다. 마음 안에서 스스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라 잠깐 그 상황에 맞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에 일어나는 이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그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 상황이 올 때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조건에 따라,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현재의 마음을 찾겠는가.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환영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파도 쳤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과거의 마음에도 현재의 마음에도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집착할 주체도 없고 집착의 대상도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집착할 마음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괴롭다, 혹은 즐겁다, 외롭다, 슬프다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또한 그런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래 없는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그래서 옛스승들은 닦을 것이 없다고 했다. 본래불이라고 했다.

 

*공연히 제 스스로 지착하고 그로 인해 아파하고 다시 그것을 놓아버린 것이니 아무 일 없는 사람에게는, 집착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꾸민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은, '아무 일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 다만 이 세상에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은 공연히 스스로 붙잡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일조차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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