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베트남
ㅡ 마지막 민족해방전쟁 - P239

미군은 통킹만 사건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 P243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마지막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44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 P244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국가였던 응우옌(Nguyen, 院) 왕조는 조선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무너졌다. - P246

레닌과 마오쩌둥을 빼고는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을 서술할 수 없듯이, 베트남전쟁은 호찌민 없이는 이야기할 수없다. - P247

‘응우옌아이쿠옥‘이 안남 지방 공무원의 아들 응우옌꿍(Nguyên Sinh Cung)으로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가 되어 30년 뒤 프랑스 군대에 궤멸적 패배를 안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P248

프랑스사회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공개 장소에 나온 1945년 8월까지 160여 개의 가명과 필명을 쓰면서 ‘26년간 지하활동‘을 했다. - P249

각계각층의 민족주의세력을 모은 베트남독립동맹(이하 베트민)을 결성한 1941년 5월부터는 다른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 하나만 썼다. - P250

‘프랑스·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민족의 독립이 공산당과 노동자·농민의 당파적 · 계급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 P251

그는 베트남이 자유로운 독립국가로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했으며, 프랑스가 베트남을 대표해 승인한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가 누리던 모든 특권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 P252

베트민은 총파업을 결의하고 사이공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 P253

베트민은 1953년 공세로 전환했으며 1954년 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적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겼다. - P254

제네바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 최강 미군과의 싸움이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 P255

자유세계의 국가들이 차례차례 쓰러진다는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 - P256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 P258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 이라 - P259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의 침략에서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 P260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 P261

바오다이 왕부터 마지막 독재자 응우옌반티에우(NguyênVan Thiêu)에 이르기까지 남베트남 권력자는 모두 외세의 앞잡이였다. - P262

점령지 청년을 강제징집한 행위는 배가 고프다고 폭탄을 삼킨 것과 같았다. - P263

대통령이 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는 선거공약으로 ‘데탕트‘를 예고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내전이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 P265

펜타곤 페이퍼 - P266

로버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 - P267

‘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냉정하게 남베트남을 버렸다. - P268

라오스와 캄보디아 산악의 ‘호찌민루트‘를 타고 은밀히 남하한 북베트남의 15만 병력은 전면전을개시했다. - P269

베트남의 사회주의혁명은 프랑스·일본·미국 군대와 싸운 백년의 전쟁이었고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 P270

캄보디아공산당 크메르 루주(Khmer Rouge)는 1970년 쿠데타로 시아누크 국왕을 몰아낸 론 놀(Lon Nol)의 군사정부와 싸웠다. - P271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72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9
맬컴 엑스
ㅡ 검은 프로메테우스 - P275

1960년 로마올림픽 권투 금메달을 땄던 ‘국민영웅 캐시어스 클레이‘는 ‘반역자 무하마드 알리‘가 되어 챔피언 타이틀과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 P279

알리는 백인 노예소유주가 조상에게 준 본래 성씨를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을 쓰면서 징집을 거부했다. - P280

백인 노예소유주가 지어준 본래의 성(姓) ‘리틀‘을 버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은 미지수 X를 성으로 썼다. - P282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1775년 미국의 13개주 모두에서 노예제는 합법이었으며, 흑인 노예는 70만 명으로전체 인구의 18% 정도였다. - P283

1865년 연방의회는 ‘노예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한 비자발적 예속 상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를 의결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 P284

남북전쟁에서 돌아온 백인들이 ‘KKK‘를 비롯한 폭력조직을 만들어 잔혹한테러를 저질렀다. - P285

‘짐 크로 법(Jim Crow Laws)‘ - P286

흑인에게 좋은 일을 한 백인은 ‘굳이 말하자면 딱 두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 P287

몽고메리 보이콧 - P290

킹 목사가 말했다. 적에게 사랑을 베풀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합시다! - P291

마셜 프래디 지음, 정초능 옮김, 『마틴 루터 킹』, 푸른숲, 2004, 35~65쪽, 킹 목사의 자서전에는 젊은 시절의 사상 편력과 지적 성장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이 평전을 참고했다. - P292

킹 목사는 흑인민권운동의 절정이었던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대행진‘에서 ‘인생연설‘을 했다. - P293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 이라고 비난했다. - P295

맬컴은 ‘분리(separation)‘는 ‘격리 (segregation)‘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 P296

맬컴과 킹 목사는 단 한 번 만났다. - P298

맬컴은 킹 목사가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인정했다. - P299

미국 인종문제의 책임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 에게 있다. - P302

맬컴은 말했다.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서로 도우며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 백인에게 생계를 의존하거나 구걸하지 말자." - P3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
히틀러
ㅡ 모든 악의 연대 - P173

바이마르 공화국 - P177

무명 화가 히틀러는 ‘비엔나 스타일‘로 알려진 도심의 크고화려한 건축물과 전시관을 순례하며 예술을 향한 열정을 키웠지만 스스로 어둡고 추잡하다고 말한 ‘하층민의 세계‘에서 처절한 가난과 고독을 맛봤다. - P178

공화국이라는 국호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 독일제국에서 황제(Kaiser)만 삭제한 ‘독일국(Das Deutsche Reich)‘을 채택했다. - P179

1919년 1월, 베르사유조약에 반대하는 바이에른의 몇몇 민족주의자가 ‘독일노동자당‘을 창립했다. - P180

당명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azi)‘ 으로 바꾸고 왕당파가 주도한 바이에른 주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 P181

‘비어홀 폭동‘ 재판에 나온 서른다섯 살의 히틀러는 반대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33년 총리직에 오른 뒤에는 역사 그 자체가 됐다. - P183

하이델베르크대학 박사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나치당의 신전 책임자가 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미디어를 조작해 ‘히틀러 신화‘를 창조 - P184

바이에른주의 조그만 단체였던 나치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헌법 규정을 이용해 공화국을 해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P186

히틀러는 민주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경제 상황에 대한 절망을 틈타 ‘새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한 망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 P187

거의 모든 투표 참가자가 찬성표를 던졌고, 히틀러는 총리(Reichskanzler) 겸 총통(Führer)‘이 됐다. - P188

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해서 만든 모든 일자리를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 P189

선사시대 게르만족이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는 죽음의 표식이 됐다. - P190

세계는 추축국과 연합국(Allied Powers)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 P191

4월 28일 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불러놓고 괴벨스를 증인으로 세워 에바 브라운과 혼인했다. - P192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오후 자살했다. - P193

민족 집단 하나를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나치밖에 없다. - P194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 P194

히틀러도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다른 민족의 체내에사는 기생충‘으로 규정했다. - P196

괴벨스가 기획하고 실행한 그 만행은 너무나 많은 건물의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해서 ‘유리의 밤(Kristalnacht)‘이라 한다. - P194

독일 보수 세력과 군부·지주 대자본가들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예찬했고, 독일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몰랐거나 모른 체하며 히틀러를 지지했다.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 P198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 이었다. - P198

독일 국민은 왜 사이비 과학과 인종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했는가? - P201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P201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고 했다. - P202

하버드대학 교수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쓴『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 책 - P203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 P204

7
팔레스타인
ㅡ 눈물 마르지 않는 참극의 땅 - P205

비밀정보기관모사드(Mossad)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한 무장단체 간부를 스무 명 넘게 암살했다. - P209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 또는 ‘이스라엘 문제‘ 의 기원을 모르고는 중동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 P210

종교와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중부 내륙에 있고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는 중부 해안에 있다. - P213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운동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테오도오 헤르츨처럼 열렬한 지지자를 불러 모은 사람은 없었다. - P214

헤르츨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시온주의자들은 2천 년 전 조상들이 떠났던 땅 팔레스타인을 후보지로 선택했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백성·천국·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P214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ㅡPicot)가 초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이크스ㅡ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 P216

타인 대표는 없었다.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반면 나치가 동유럽 수용소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참상을 확인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전투적인 태도로 국가 건설 계획을 밀고 나갔다. - P217

시온주의 무장 세력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로 알려진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었다. - P218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 건국을 ‘문명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 P220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 P221

중동전쟁과 PLO - P222

‘아슈케나짐 (Ashkenazim)‘ 
‘세파르딤 (Sephardim)‘
‘팔라샤(Falasha)‘ - P223

10월 29일 모셰 다얀(Moshe Dayan) 장군의 전차부대를 앞세운 이스라엘 육군이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공군은 운하 입구 도시를 공습했다. - P224

제3차 중동전쟁 - P225

제4차 중동전쟁 - P226

 ‘원유 무기화‘ 정책은 세계경제를 혼돈에 빠뜨렸다. - P227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결의 3236조를 채택하고 PLO를 옵서버 단체‘로 받아들였다. - P229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종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Khomeini) - P229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명분도 없이 침략했다가 ‘걸프전쟁‘에서 참패했지만 아랍 민중의 영웅이 됐다. - P231

제1차 인티파다 때 가자 지구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직한 ‘하마스(Hamas)‘였다. - P232

아라파트는 베냐민 네타냐후 (Benjamiin Netanyathm)와 에후드 바라크 (Ehud Barak) 등 라빈 총리의 후임자들과 끈질기게 협상하면서 자치정부를 운영했다. - P234

팔레스타인은 고대의 선지자가 말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수백만 팔레스타인 민중의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이자 살상 무기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세계의 화약고일 뿐이다. - P2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
대장정
ㅡ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신화 - P131

여덟 번째 통일 영웅 - P135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홍군 - P135

노동자·농민·지식인 민족부르주아지 대표가 모인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선출했다. - P136

최초의 ‘아시아적 전제국가‘를 세운 인물은 기원전 202년 항우를 꺾고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이었다. - P137

민권·민족·민생을 강조한 ‘삼민주의‘를 내세워 전제정치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 국민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 - P138

장제스는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해 군벌시대를 끝내고 난징에 새 정부를 세웠다. 그것을 ‘국민정부‘ 라고한다. - P140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말이 전국대회였지 소련이 주도한 공산주의국제연합(코민테른) 참관인 둘을 빼면 참석자가 열둘밖에 되지 않았고 당원은 53명에 불과했다. - P141

장제스를 불신하고 국공합작에 반대한 마오쩌둥은 후난성에서 조직한 농민조합과 광부, 국민당 반란군을 규합해 자기 방식의 투쟁을 시작했다. - P142

주더는 쓰촨성 출신이지만 1912년 제2국민혁명 때 윈난성 신식 군대에서 활약해 공안국 장관이 됐다. - P143

편의상 징강산 일대의 소비에트를 장시 소비에트‘, 공산당 군대를 ‘홍군‘, 국민정부군과 군벌과 민단 등 장제스가 지휘한 병력을 ‘백군(白軍)‘이라 하자. - P144

홍군은 전투를 치를 때마다 무기를 노획하고 병력을 늘렸을 뿐 아니라 ‘중화소비에트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하고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 P145

‘항일구국전쟁을 위한 장정‘ - P146

에드거 스노의 기록보다는 홍군 특공대가 마을 주민에게 돈을 주고 구한 배로 강을 건너 북안의 쓰촨성 세관을 점령했다는 『대장정』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정성호 옮김, 범우사, 1999), 274~275쪽의 증언이 더 믿을 만하다. - P147

마오쩌둥ㆍ주더ㆍ린뱌오ㆍ펑더화이 등 홍군 수뇌부 - P148

자오핑두와 루딩교에서 치러진 도강작전은 대장정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 P149

마오쩌둥의 지략과 홍군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국민정부가 그처럼 무능하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 P150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강연에서 말한 대로 홍군은 군사적 열세를 정치로 극복했다. - P152

쉬하이둥은 ‘어위완소비에트‘를 세웠고 류즈단은 서북 내륙에서 산시(陝西)·간쑤·닝샤(寧夏) 소비에트의 터를 닦았다. - P153

시안(西安)사건 - P153

입법권과 행정권을 하나로 통합하고 공산당이 지휘 감독했다는 점에서 산시성(陝西省) 소비에트는 ‘붉은 중국‘을 키운 인큐베이터였다고 할 수 있다. - P154

병사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웬만큼 이해했으며 자신이 참여한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했다. - P156

민족통일전선전술 - P157

사령관 장쉐량은 총통의 각성을 위해 시안 체류를 요청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국민정부가 모든 정치세력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요청하는 ‘구국의 요구‘ 8개 항을 제시했다. - P158

쑨원의 처제이자 장제스이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 - P160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자 이득을 봤다. - P161

장제스는 소비에트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확고한 권위를 세웠다. - P162

마오쩌둥은 백군의 봉쇄망을 풀어 물자와 인력을 보충하면 항일전쟁과 내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P162

그러나 중국은 광활한 나라였다. 100만 일본군도 점(도시)과 선(철도와 도로)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 P163

‘신4군 사건‘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고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던 신4군 정예 9천 명을 국민정부군 8만 명이 포위 공격해 궤멸한 사건이다. - P164

1949년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 P165

장제스는 대만의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중화민국을 세웠다. 1975년에 죽을때까지 지킨 총통 자리는 아들 장징궈가 물려받았다. - P166

레닌은 혁명조직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공언했지만 마오쩌둥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 P167

스탈린이 ‘사회주의 차르‘가 된 것처럼 마오쩌등도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 P168

인민이 굶어 죽은 대참사가 벌어진 뒤에야 마오쩌둥은 실용주의자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각각 국가 주석과 당서기 직을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 P169

덩샤오핑 이후 권력자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마오쩌둥 때와 같은 개인숭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70

빈부격차는 여느 자본주의사회못지않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는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심하다. - P171

그러나 정치체제만큼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설계한 그대로다. - P171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
러시아 혁명
ㅡ 아름다운 이상의 무모한 폭주 - P69

핀란드역에서 - P73

레닌의 러시아 귀환 과정과 핀란드역 연설은 『핀란드역까지』(에드먼드 윌슨 지음, 김정민·정승진 옮김, 실천문학사, 1987), 407~425쪽을 참조해 서술했다. - P73

레닌이었다.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iadimir lich Ulyanov)인 그는 ‘2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Nadlezhda Krunskaya)와 함께 스위스 취리히에 있었다. - P74

한 사람의 기질과 의지와 목표의식이 역사에 그토록 크고 깊은 각인을 남긴 경우는 흔치 않다. - P74

데카브리스트(12월) 반란 - P75

알렉산드르 2세
해방자 황제 - P76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허망한 실패로 끝나자 나로드니키는 사회혁명당을 비롯한 여러 징치단체와 비밀결사를만들어 정부 요인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인 것도 그들이었다. - P77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 1월 9일) 일요일 - P78

혁명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가폰 신부가 몰래 귀국해 다시 경찰과 손잡았고 ‘배신자‘를 사회혁명당 당원들이 ‘처단‘ 한 것 - P80

레닌은 차르 정부를 타도하고 세울 정부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또는 절대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했다. - P81

레닌 그룹은 볼셰비키 (Bolstheviki, 다수파)를 자처하면서 반대파를 멘세비키(Mensheviki, 소수파)라 했다. - P81

포템킨호 반란사건 1905년 6월 - P81

트로츠키는 ‘피의 일요일‘ 직후 망명지에서 돌아와 불같은연설과 빛나는 글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면 레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 P82

러시아를 집어삼킬 듯했던 혁명의 파도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 P83

‘유능한 독재자‘ 스톨리핀은 ‘건전한 독재‘를 했다. - P84

니콜라이 2세는 보통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만큼 나약하고우둔했으며, 자신보다 더 어리석은 독일 출신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휘둘렸다. - P85

시베리아 출신 정교회 수도자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이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P85

서른여섯 살의 엘리트 정치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말했다. "장관들을 체포하고 우체국, 전신전화국, 철도역, 정부 청사를 점령하라!" - P88

선진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러시아 같은 ‘자본주의 세계제제의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다. 그게 법칙이다. - P90

 레닌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을 비롯한 수정주의자‘ 와도 싸웠다. - P91

볼셰비키혁명 - P93

1905년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이끌고 1917년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될 사람, 트로츠키였다. - P93

레닌이 케렌스키를 피해 핀란드로 도망가 있는 동안 볼셰비키를 명실상부한 다수파로 키웠고, 귀족·지주·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가 외국의 지원을 받으며 혁명정부를 공격했을 때는 붉은 군대‘를 지휘해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 P95

제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혁명의 승리를 선포했고 레닌은 ‘노동자 농민의 정부‘ 인민위원장이 됐다. 이 사건을 ‘10월혁명‘ 또는 ‘볼셰비키혁명‘이라고 한다. - P96

볼셰비키혁명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꿨다. - P98

레닌과 볼셰비키는 말과 글로만 존재하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 P99

첫째, 사회혁명은 구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뒤에 일어났다. - P99

둘째, 사회혁명은 구체제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낳았다. - P100

셋째, 사회혁명은 열병과 같아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을정도로 잔혹한 행위를 했다. - P100

그들의 ‘위대한 실험‘은 끔찍하고 허망한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공포정치와 경제의 비효율 - P103

4
대공황
ㅡ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 - P105

뉴욕의 ‘끔찍한 목요일‘ - P109

19세기부터 여러 차례 심각한 불황을 겪었지만 그토록 길고 파멸적이고 세계적인 불황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대공황(大恐院, Great Depression)이라고 한다. - P110

침체(recession)는 가볍고 불황(depression)은 심각하다. 불황이 갑자기 찾아와 모든 경제주체가 공포에 빠지면 공황(panic)이고, 그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위기 (crisis)라고 한다. 대공황은 이례적으로 깊고 길게 이어진 불황이었다. - P111

연방준비은행(FEB)이 1913년에 출범했지만 은행의 연쇄파산을 막을 만한 권한이 없었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자 기업 도산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 P113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특성과 결함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인간의 ‘필요(need)‘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demand)‘에 응답한다. - P114

만인이 저마다 자기 욕망을 충족하게끔 허용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의 부를 최대로 키워준다고 한 애덤 스미스(Adamn Smith)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 P115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가격변동을 매개로 한 ‘자동 조정 시스템‘이다. - P116

자본주의체제와 주류 경제학은 파산했다. - P120

케인스혁명
루스벨트와 히틀러의 대증요법이 효과를 낸 이유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hard Keynes)가 1936년에 출간한『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설명했다. - P120

언론인과 정치인은 의심했지만 젊은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 P123

거시경제이론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난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과 유럽 국가의 경제정책을 좌우했다. 혁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세상에 영향을 줬다. - P124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소중히 여긴 영국·프랑스 미국은 ‘정부의 보이는 주먹‘으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수정했지만, 후발 산업국인 독일·일본·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전체주의 또는 파시즘(fascism)으로 내달렸다. - P125

미국은 대공황 시기에 의미 있는 제도 변화를 이뤘다. 마뜩잖게 여긴 이들은 ‘복지국가‘ 시대가 왔다고 개탄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도 개혁은 사회를 어느 정도 바꿨다. - P127

참혹했던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 속에서 끝났다.
사회주의자들의 희망사항인 자본주의체제 붕괴는 없었다. - P128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나은 대안이 없는‘ 경제체제가 됐다. - P129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 P129

우리의 20세기와 전환의 순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시민 지음

서문 - P5

오래된 책을 다시 펴내며 - P5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 P5

역사를 안다고 해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마는, 나는 그저 아는 것 자체가 좋아서 다른 나라 역사를 공부했다. - P6

‘1980년대 지식 청년의 지적 반항‘ 이라는 평을 들은『거꾸로 읽는 세계사』에는 예전의 내가 있었다. - P7

돌베개

20세기 세계사의 위대한 성취인 민주주의와 디지털혁명의혜택을 한껏 누리며 글을 썼다. - P8

나는 교과서와 언론이 소홀하게 취급하는 몇몇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고 어떤 사건은 다른 시각으로 서술했다. 그래서 책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 - P9

1
드레퓌스 사건
ㅡ 20세기의 개막 - P17

반역자 드레퓌스 - P21

군사기밀을 누설한 내부자를 적발하려고  - P21

이스라엘은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고 관련 문서와 증언 등 사료를 검토해 육군 정보부가 처음부터 드레퓌스를 표적으로 삼아 음모를 꾸몄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 P21

범인의 태도였다. 드레퓌스는 단 한 번도 혐의를 시인하지 않았다. - P22

우연히 진실을 발견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그 진실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드레퓌스 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25

국방부와 합참본부 장군들이 피카르의 보고를 제대로 처리했다면 드레퓌스는 1896년 여름에 풀려났을 것이다. - P26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는 동생의 이름을 다시 세상에 불러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 P27

에밀 졸라의 고발 - P28

그때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가 참전해 전황을 단숨에 바꿨다. - P30

드레퓌스의 결백을 증명하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자 재심 반대파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 P32

그것은 전 인류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할, 우리의 비열함에 대한 고백록인 셈이다. - P35

졸라와 피카르 중령뿐 아니라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했던 국방부와 참모본부의 장군들도 소송에 휘말렸고, 그 소송 하나하나가 저마다 만만치 않은 정치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 P36

국방부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드레퓌스의 육군소령 복귀식을 열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 P37

드레퓌스 사건을 오래 기억하는 까닭은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린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39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면서 프랑스 국민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깊이 체득했다. - P40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과 언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 P41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 P43

2
사라예보 사건
ㅡ 광야를 태운 한 점의 불씨 - P45

사라예보의 총성 - P49

저격범은 열아홉 살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 피해자는 오스트리아ㅡ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였다. 황태자비 조피는 즉사하고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사건을 ‘사라예보 사건‘ 이라고 한다. - P49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 · 크로아티아 등으로 흩어진 세르비아 민족은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19세기 초에 무장 독립투쟁을 시작했고,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이 부딪친 두 차례의 ‘발칸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서서 싸운 끝에 1882년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 세르비아왕국을 수립했다. - P50

프린치프는 보스니아 서부 시골 마을에서 무슬림 지주의 땅을 소작하는 세르비아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 P51

프린치프가 쏜 총알은 바싹 마른 들판에 던진 불씨였다. 그때까지 본 적없는 화염을 일으켜 유럽을 불태우고 세계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 P52

유럽의 화약고 - P53

사라예보 사건은 여러 단계를 거쳐 ‘국제전‘으로 번졌다. - P54

합스부르크제국‘은 중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빈에 거주지를 두고 수백 년 동안 지배한국가를 통칭한다.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합스부르크제국, 오스트리아ㅡ헝가리제국 또는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 P55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된 ‘부르주아 정부‘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 P57

400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 P57

독일을 중심으로 한 진영을 ‘동맹국이라 하고 영국·프랑스쪽을 ‘연합국‘이라 하자. - P59

제국들의 무덤 - P61

‘평화원칙 14개 조항‘을 발표 - P62

① 공해의 자유 항해권 보장, 평등한 국제무역 체제 수립
② 군비축소
③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④ 러시아 내정에 대한 불간섭
⑤ 벨기에 주권 회복,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귀속, 폴란드 독립 보장
⑥ 민족적 자립 원칙에 의거한 이탈리아 국경 재조정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민족문제 해결
⑦ 발칸 지역의 민족적 독립
③ 오스만제국의 튀르크인 영토주권 존중과 여러 민족의 자치 보장
⑨ 국제연맹 창설 - P62

민족자결주의 - P63

사라예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 제1차 전쟁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 P64

영국 경제학계의 이단아 존 홉슨(John Hobson) - P65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 P67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 P67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