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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ㅡ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신화 - P131

여덟 번째 통일 영웅 - P135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홍군 - P135

노동자·농민·지식인 민족부르주아지 대표가 모인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선출했다. - P136

최초의 ‘아시아적 전제국가‘를 세운 인물은 기원전 202년 항우를 꺾고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이었다. - P137

민권·민족·민생을 강조한 ‘삼민주의‘를 내세워 전제정치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 국민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 - P138

장제스는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해 군벌시대를 끝내고 난징에 새 정부를 세웠다. 그것을 ‘국민정부‘ 라고한다. - P140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말이 전국대회였지 소련이 주도한 공산주의국제연합(코민테른) 참관인 둘을 빼면 참석자가 열둘밖에 되지 않았고 당원은 53명에 불과했다. - P141

장제스를 불신하고 국공합작에 반대한 마오쩌둥은 후난성에서 조직한 농민조합과 광부, 국민당 반란군을 규합해 자기 방식의 투쟁을 시작했다. - P142

주더는 쓰촨성 출신이지만 1912년 제2국민혁명 때 윈난성 신식 군대에서 활약해 공안국 장관이 됐다. - P143

편의상 징강산 일대의 소비에트를 장시 소비에트‘, 공산당 군대를 ‘홍군‘, 국민정부군과 군벌과 민단 등 장제스가 지휘한 병력을 ‘백군(白軍)‘이라 하자. - P144

홍군은 전투를 치를 때마다 무기를 노획하고 병력을 늘렸을 뿐 아니라 ‘중화소비에트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하고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 P145

‘항일구국전쟁을 위한 장정‘ - P146

에드거 스노의 기록보다는 홍군 특공대가 마을 주민에게 돈을 주고 구한 배로 강을 건너 북안의 쓰촨성 세관을 점령했다는 『대장정』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정성호 옮김, 범우사, 1999), 274~275쪽의 증언이 더 믿을 만하다. - P147

마오쩌둥ㆍ주더ㆍ린뱌오ㆍ펑더화이 등 홍군 수뇌부 - P148

자오핑두와 루딩교에서 치러진 도강작전은 대장정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 P149

마오쩌둥의 지략과 홍군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국민정부가 그처럼 무능하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 P150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강연에서 말한 대로 홍군은 군사적 열세를 정치로 극복했다. - P152

쉬하이둥은 ‘어위완소비에트‘를 세웠고 류즈단은 서북 내륙에서 산시(陝西)·간쑤·닝샤(寧夏) 소비에트의 터를 닦았다. - P153

시안(西安)사건 - P153

입법권과 행정권을 하나로 통합하고 공산당이 지휘 감독했다는 점에서 산시성(陝西省) 소비에트는 ‘붉은 중국‘을 키운 인큐베이터였다고 할 수 있다. - P154

병사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웬만큼 이해했으며 자신이 참여한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했다. - P156

민족통일전선전술 - P157

사령관 장쉐량은 총통의 각성을 위해 시안 체류를 요청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국민정부가 모든 정치세력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요청하는 ‘구국의 요구‘ 8개 항을 제시했다. - P158

쑨원의 처제이자 장제스이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 - P160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자 이득을 봤다. - P161

장제스는 소비에트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확고한 권위를 세웠다. - P162

마오쩌둥은 백군의 봉쇄망을 풀어 물자와 인력을 보충하면 항일전쟁과 내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P162

그러나 중국은 광활한 나라였다. 100만 일본군도 점(도시)과 선(철도와 도로)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 P163

‘신4군 사건‘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고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던 신4군 정예 9천 명을 국민정부군 8만 명이 포위 공격해 궤멸한 사건이다. - P164

1949년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 P165

장제스는 대만의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중화민국을 세웠다. 1975년에 죽을때까지 지킨 총통 자리는 아들 장징궈가 물려받았다. - P166

레닌은 혁명조직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공언했지만 마오쩌둥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 P167

스탈린이 ‘사회주의 차르‘가 된 것처럼 마오쩌등도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 P168

인민이 굶어 죽은 대참사가 벌어진 뒤에야 마오쩌둥은 실용주의자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각각 국가 주석과 당서기 직을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 P169

덩샤오핑 이후 권력자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마오쩌둥 때와 같은 개인숭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70

빈부격차는 여느 자본주의사회못지않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는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심하다. - P171

그러나 정치체제만큼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설계한 그대로다. - P171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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