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히틀러
ㅡ 모든 악의 연대 - P173

바이마르 공화국 - P177

무명 화가 히틀러는 ‘비엔나 스타일‘로 알려진 도심의 크고화려한 건축물과 전시관을 순례하며 예술을 향한 열정을 키웠지만 스스로 어둡고 추잡하다고 말한 ‘하층민의 세계‘에서 처절한 가난과 고독을 맛봤다. - P178

공화국이라는 국호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 독일제국에서 황제(Kaiser)만 삭제한 ‘독일국(Das Deutsche Reich)‘을 채택했다. - P179

1919년 1월, 베르사유조약에 반대하는 바이에른의 몇몇 민족주의자가 ‘독일노동자당‘을 창립했다. - P180

당명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azi)‘ 으로 바꾸고 왕당파가 주도한 바이에른 주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 P181

‘비어홀 폭동‘ 재판에 나온 서른다섯 살의 히틀러는 반대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33년 총리직에 오른 뒤에는 역사 그 자체가 됐다. - P183

하이델베르크대학 박사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나치당의 신전 책임자가 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미디어를 조작해 ‘히틀러 신화‘를 창조 - P184

바이에른주의 조그만 단체였던 나치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헌법 규정을 이용해 공화국을 해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P186

히틀러는 민주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경제 상황에 대한 절망을 틈타 ‘새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한 망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 P187

거의 모든 투표 참가자가 찬성표를 던졌고, 히틀러는 총리(Reichskanzler) 겸 총통(Führer)‘이 됐다. - P188

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해서 만든 모든 일자리를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 P189

선사시대 게르만족이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는 죽음의 표식이 됐다. - P190

세계는 추축국과 연합국(Allied Powers)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 P191

4월 28일 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불러놓고 괴벨스를 증인으로 세워 에바 브라운과 혼인했다. - P192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오후 자살했다. - P193

민족 집단 하나를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나치밖에 없다. - P194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 P194

히틀러도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다른 민족의 체내에사는 기생충‘으로 규정했다. - P196

괴벨스가 기획하고 실행한 그 만행은 너무나 많은 건물의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해서 ‘유리의 밤(Kristalnacht)‘이라 한다. - P194

독일 보수 세력과 군부·지주 대자본가들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예찬했고, 독일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몰랐거나 모른 체하며 히틀러를 지지했다.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 P198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 이었다. - P198

독일 국민은 왜 사이비 과학과 인종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했는가? - P201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P201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고 했다. - P202

하버드대학 교수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쓴『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 책 - P203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 P204

7
팔레스타인
ㅡ 눈물 마르지 않는 참극의 땅 - P205

비밀정보기관모사드(Mossad)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한 무장단체 간부를 스무 명 넘게 암살했다. - P209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 또는 ‘이스라엘 문제‘ 의 기원을 모르고는 중동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 P210

종교와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중부 내륙에 있고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는 중부 해안에 있다. - P213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운동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테오도오 헤르츨처럼 열렬한 지지자를 불러 모은 사람은 없었다. - P214

헤르츨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시온주의자들은 2천 년 전 조상들이 떠났던 땅 팔레스타인을 후보지로 선택했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백성·천국·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P214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ㅡPicot)가 초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이크스ㅡ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 P216

타인 대표는 없었다.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반면 나치가 동유럽 수용소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참상을 확인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전투적인 태도로 국가 건설 계획을 밀고 나갔다. - P217

시온주의 무장 세력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로 알려진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었다. - P218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 건국을 ‘문명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 P220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 P221

중동전쟁과 PLO - P222

‘아슈케나짐 (Ashkenazim)‘ 
‘세파르딤 (Sephardim)‘
‘팔라샤(Falasha)‘ - P223

10월 29일 모셰 다얀(Moshe Dayan) 장군의 전차부대를 앞세운 이스라엘 육군이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공군은 운하 입구 도시를 공습했다. - P224

제3차 중동전쟁 - P225

제4차 중동전쟁 - P226

 ‘원유 무기화‘ 정책은 세계경제를 혼돈에 빠뜨렸다. - P227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결의 3236조를 채택하고 PLO를 옵서버 단체‘로 받아들였다. - P229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종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Khomeini) - P229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명분도 없이 침략했다가 ‘걸프전쟁‘에서 참패했지만 아랍 민중의 영웅이 됐다. - P231

제1차 인티파다 때 가자 지구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직한 ‘하마스(Hamas)‘였다. - P232

아라파트는 베냐민 네타냐후 (Benjamiin Netanyathm)와 에후드 바라크 (Ehud Barak) 등 라빈 총리의 후임자들과 끈질기게 협상하면서 자치정부를 운영했다. - P234

팔레스타인은 고대의 선지자가 말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수백만 팔레스타인 민중의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이자 살상 무기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세계의 화약고일 뿐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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