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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ㅡ 마지막 민족해방전쟁 - P239

미군은 통킹만 사건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 P243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마지막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44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 P244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국가였던 응우옌(Nguyen, 院) 왕조는 조선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무너졌다. - P246

레닌과 마오쩌둥을 빼고는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을 서술할 수 없듯이, 베트남전쟁은 호찌민 없이는 이야기할 수없다. - P247

‘응우옌아이쿠옥‘이 안남 지방 공무원의 아들 응우옌꿍(Nguyên Sinh Cung)으로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가 되어 30년 뒤 프랑스 군대에 궤멸적 패배를 안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P248

프랑스사회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공개 장소에 나온 1945년 8월까지 160여 개의 가명과 필명을 쓰면서 ‘26년간 지하활동‘을 했다. - P249

각계각층의 민족주의세력을 모은 베트남독립동맹(이하 베트민)을 결성한 1941년 5월부터는 다른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 하나만 썼다. - P250

‘프랑스·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민족의 독립이 공산당과 노동자·농민의 당파적 · 계급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 P251

그는 베트남이 자유로운 독립국가로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했으며, 프랑스가 베트남을 대표해 승인한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가 누리던 모든 특권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 P252

베트민은 총파업을 결의하고 사이공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 P253

베트민은 1953년 공세로 전환했으며 1954년 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적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겼다. - P254

제네바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 최강 미군과의 싸움이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 P255

자유세계의 국가들이 차례차례 쓰러진다는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 - P256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 P258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 이라 - P259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의 침략에서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 P260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 P261

바오다이 왕부터 마지막 독재자 응우옌반티에우(NguyênVan Thiêu)에 이르기까지 남베트남 권력자는 모두 외세의 앞잡이였다. - P262

점령지 청년을 강제징집한 행위는 배가 고프다고 폭탄을 삼킨 것과 같았다. - P263

대통령이 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는 선거공약으로 ‘데탕트‘를 예고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내전이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 P265

펜타곤 페이퍼 - P266

로버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 - P267

‘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냉정하게 남베트남을 버렸다. - P268

라오스와 캄보디아 산악의 ‘호찌민루트‘를 타고 은밀히 남하한 북베트남의 15만 병력은 전면전을개시했다. - P269

베트남의 사회주의혁명은 프랑스·일본·미국 군대와 싸운 백년의 전쟁이었고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 P270

캄보디아공산당 크메르 루주(Khmer Rouge)는 1970년 쿠데타로 시아누크 국왕을 몰아낸 론 놀(Lon Nol)의 군사정부와 싸웠다. - P271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72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9
맬컴 엑스
ㅡ 검은 프로메테우스 - P275

1960년 로마올림픽 권투 금메달을 땄던 ‘국민영웅 캐시어스 클레이‘는 ‘반역자 무하마드 알리‘가 되어 챔피언 타이틀과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 P279

알리는 백인 노예소유주가 조상에게 준 본래 성씨를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을 쓰면서 징집을 거부했다. - P280

백인 노예소유주가 지어준 본래의 성(姓) ‘리틀‘을 버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은 미지수 X를 성으로 썼다. - P282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1775년 미국의 13개주 모두에서 노예제는 합법이었으며, 흑인 노예는 70만 명으로전체 인구의 18% 정도였다. - P283

1865년 연방의회는 ‘노예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한 비자발적 예속 상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를 의결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 P284

남북전쟁에서 돌아온 백인들이 ‘KKK‘를 비롯한 폭력조직을 만들어 잔혹한테러를 저질렀다. - P285

‘짐 크로 법(Jim Crow Laws)‘ - P286

흑인에게 좋은 일을 한 백인은 ‘굳이 말하자면 딱 두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 P287

몽고메리 보이콧 - P290

킹 목사가 말했다. 적에게 사랑을 베풀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합시다! - P291

마셜 프래디 지음, 정초능 옮김, 『마틴 루터 킹』, 푸른숲, 2004, 35~65쪽, 킹 목사의 자서전에는 젊은 시절의 사상 편력과 지적 성장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이 평전을 참고했다. - P292

킹 목사는 흑인민권운동의 절정이었던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대행진‘에서 ‘인생연설‘을 했다. - P293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 이라고 비난했다. - P295

맬컴은 ‘분리(separation)‘는 ‘격리 (segregation)‘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 P296

맬컴과 킹 목사는 단 한 번 만났다. - P298

맬컴은 킹 목사가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인정했다. - P299

미국 인종문제의 책임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 에게 있다. - P302

맬컴은 말했다.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서로 도우며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 백인에게 생계를 의존하거나 구걸하지 말자."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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