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음모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5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박계수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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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때
- [파라오의 음모],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이제, 반덴베르크와 작별할 시간이다.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이 2025년 5월 초였으니, 이제 한달 반 정도를 그의 책을 들고 다니며 밤낮으로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책이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총 4권 뿐이니, 이제 더 함께 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에 관한 정보는 우리나라에 그리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독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다가 기자직에 잠시 종사했고, 1973년에 '파라오' 관련 소설을 처음 발표한 후 1975년부터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왔다는 그의 삶은, 실은 내가 관심있는 모든 분야가 녹아있는 삶 그 자체였다. 나도 문학을 전공했고 이십대에 소설을 쓰고 싶었으며, 미술사에 관심이 깊은데다가 하물며 어린 시절 잠시 꿈이 고고학자였다. 그리고 지금의 꿈은, 그냥 인류의 고전들을 중심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끊임없이 글도 쓰다가 또 여가로 종이접기나 하면 좋겠다는 것이니, 종이접기 취미만 뺀다면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정확히 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종이접기에 너무 매진하다가 4월 들어 갑자기 읽을 책이 궁색해졌고 그래서 들어가 보았던 아버지의 오랜 책장에서 발견한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필리프 반덴베르크를 알게 되지 못했을 거다. 아버지 책장에 있던 [세 도시 이야기]를 읽다가 그 출판사인 <한길사>의 책소개 부록에서 반덴베르크를 알게 되었으니까, 결국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인도로 만나게 된 거였다.
아버지, 잘 계시지요? ^^*

우리나라에 소개된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은 내가 읽은 순서대로 하면,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1993),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과 마지막으로 내가 읽은 [파라오의 음모](1990), 
이렇게 4권이다.

2000년도에 번역된 [미켈란젤로의 복수]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은 로마 바티칸 가톨릭 교황청이 은폐하려는 '제5복음서'의 존재를 암시하는 종교적 '이단' 이야기, 
2001년도에 번역된 [구텐베르크의 가면]과 [파라오의 음모]는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인류 문명적 '이단'에 관한 소설이다.

[성경]이 전하는 정통 '4대 복음서'와 달리,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제5복음서'의 숨은 저자처럼, 
[파라오의 음모](1990)에서도 숨어서 결코 나오지 않는 인류 문명의 '이단'적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그가 바로,
'임호테프'다.


"'임호테프'는 의사이며 설계사, 그리고 사제이면서 현자였어. 그는 기원전 2,500년, 파라오 조세르가 통치하던 때에 살았지. 그리고 피라미드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지혜론도 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는 파라오 조세르를 위해 그의 신분에 걸맞는 무덤, 즉 사카라의 계단 피라미드를 건축했단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생각하지. 이 피라미드 주위에서 고고학자들이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수많은 조각들을 발견했어. 그래서 이 근처에서 그의 묘지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곤 하지.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묘지지!"
- [파라오의 음모], <고양이 낙인의 비밀> 중 '크리스토퍼 셸리의 설명',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첫 작품이 '파라오' 관련이었다는데, 아마도 이 책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가 아닐까 나는 추측한다. 1973년에 그 동안 고대 이집트 유물 발굴과 관련하여 통속적으로 전해지던 '파라오의 저주'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썼고, 1990년에 이 작품을 수정증보한 게 아닐까 하는. 아마도 관련 정보를 더 찾지 못한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 본문이 되는 일기의 저자인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를 쫓아가게 된 마지막 장 <흔적이 끝나는 곳>의 말미가 '1990년 8월'인 것이 1973년에 예측한 미래 시간인지, 1990년에 오마르의 일지의 앞뒤로 덧붙인 소설 속 화자의 기록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내가 읽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역사추리소설 4권 모두 모종의 신비로운 화자의 회상이나 기록을 통해 본문이 전개되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일관성은 있다.

역사추리소설이라 각 이야기 속에는 실존인물들이 나온다. [파라오의 음모]에서는 이집트의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 1874~1939)가 등장한다. 영화 [미이라]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주인공처럼 대학에서 정식으로 고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17세부터 이집트로 가서 꾸준히 유적 발굴의 경험을 쌓고 1922년 결국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집토마니아' 전성기를 열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모든 고고학적 문명 유산들이 그럴 것이지만, 고대 지배계급의 무덤은 온갖 보물로 가득했을 것이고 현대 고고학자들을 후원했던 부자들의 동기가 그렇듯, 도굴은 도둑질만큼 인류의 오랜 문화적 습성이었을 게다. 실제로 하워드 카터가 고대 이집트 무덤을 발굴할 당시에도 유명한 파라오(왕)의 무덤들은 발견해 봤자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상태였고 그나마 투탕카멘 같은 요절하여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거의 없던 파라오의 무덤은 도굴꾼들 조차도 무시해버린 무덤이었다. 오랜 세월 잊혀진 유물의 문을 수천 년만에 처음 열었기에 하워드 카터와 투탕카멘이 현대에 더욱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호테프'가 등장한다.
현대의 '도굴업자'인 고고학자와 그 후원자를 비롯한 역사 속 모든 '도굴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설 [파라오의 음모] 속 주인공 오마르를 하인으로 고용하여 고고학적 경험을 겪게 해주는 영국의 학자이자 첩자 크리스토퍼 셸리가 위에서처럼 소개하듯 고대 이집트의 의사이자 건축가, 기술자인 동시에 철학자로서 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자로 알려진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무덤 속 문장을 통해 왕의 보물을 훔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무서운 주체로 나타난다.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발견 직후 감염으로 죽은 카터의 오랜 후원자 카나번 경의 이야기는 반덴베르크의 [파라오의 음모]에도 등장한다. 발굴자 카터 본인은 64세까지 살았지만 후원자 카나번의 저주받은 죽음의 배후에는 임호테프가 고대에 이미 발견한 '바이러스'가 무덤의 침입자들을 공격했다는 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였던 소설 속 배경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분할과 재분할 문제를 두고 각축을 벌이던 때다. 
소설 속 일기의 주인공 오마르 무사는 이집트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지역 출신의 낙타몰이꾼 청년으로 영국인 학자이자 첩자 크리스토퍼 셸리의 하인으로 들어가 있던 중 우연히 이집트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인 '타다만'의 고양이 낙인이 찍히게 되면서 갖은 고초 끝에 독일의 부자 노스티츠 남작의 후원 아래 실종된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를 추적하게 된다. 하트필드는 카터처럼 실존 인물이 아닌 소설 속 가상의 고고학자로서 파라오가 아닌 고대의 실질적 실력자 '임호테프'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처음 발견하여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발굴함으로써 세계 지배의 길을 열고자 했던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임호테프' 무덤의 비밀을 발견한 실종된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를 서로 먼저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만, 결국 하트필드를 찾은 건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였고, 그럼에도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설계자 '임호테프'에게로 가는 길을 막은 사람 또한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가 된다.


"... 학문은 때때로 신앙이 넘어서는 것을 금하는 그런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간은 그것을 통찰할 수는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신을 믿는 인간은 자신의 불손을 억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은 인간의 근원적인 성격이죠. 구약에서 이미 인간은 신과 같이 되려고 시도했어요.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벌을 주었죠. '임호테프'는 그런 인간이었어요. 그는 신에게 받은 재능으로 인간에게 금지된 일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임호테프는 이집트 사람들이 수백년 동안 상징적인 방식으로 시도했던 것을 현실로 전환시켰죠. 즉 그의 육체 안에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생명력인 '카(영혼)'를 보유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함의 형태, 즉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죠. 그는 비밀스런 약제를 발견했어요. '박테리아', 우리 말로 하자면 '바이러스'죠. 이 문제에 있어서 고대 이집트인의 지식은 우리가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 [파라오의 음모], <피라미드의 그림자> 중 '에드워드 하트필드의 설명',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필리프 반덴베르크와 같이 역시 언론인이자 기자 출신의 역사추리작가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1995)에서는 신비스럽지만 수학적으로 정확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 등 고대 문명의 비밀이 그보다 더 오랜 고대의 남극대륙으로부터 바다 건너온 선지적이고 구세주적인 문명인이 남긴 일종의 '신의 지문'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이 피라미드 같은 문명을 개척한 인물로 '임호테프(Imhotep : 기원전 26세기)'라 전해왔고, 소설 [파라오의 음모] 속 가상의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는 '임호테프' 무덤을 발견했다가 그 무서운 저주의 비밀을 안고 실종된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은밀하지만 치열한 첩보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 오마르와 나깁 일행이 독일 남작의 후원으로 이집트의 기독교 '이단' 단체인 '콥트교' 수도원에 갇혀있던 하트필드를 구출해 왔으나 하트필드는 그의 유산을 노리던 영국인 첩자 윌리엄 칼라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마는데, 하트필드가 죽기 전에 오마르 일당에게 했던 위와 같은 설명은 말 그대로 현대판 '임호테프'의 경고가 된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어찌 읽으면 구닥다리 같은 잠언은, 
자연과 역사 앞에 선 인간에게 교만해지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임호테프'가 '신' 또는 '자연', 아니면 '순리' 같은 것을 초월하려는 당대의 교만한 자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랬던 그의 무덤은 후세에게 교만하지 말라는 무서운 경고장 자체가 되면서 인간이 함부로 그 '신'의 영역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상징으로 남는다.
이집트인 오마르 일행은 현명하게 이 경고를 듣고 '암호테프'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았고 끝까지 그 비밀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원자인 독일 제국주의자 구스타프 노스티츠 발니츠 남작은 홀로 '임호테프' 무덤을 파내려고 하다가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만다.

'음모(Komplott)'의 주체가 '파라오(Pharao)'가 아닌 '임호테프(Imhotep)'이기에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라는 제목과는 정확히 맞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verg)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는지.

생사 조차도 알 수 없는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역작들과 그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제, 그의 책들을 떠나 보낸다.

***

1.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1990), Philipp Vandenbeg, 박계수 옮김, <한길사>, 2001.
2. [구텐베르크의 가면(Der Spiegelmacher)](1998), Philipp Vandenberg, 최상안 옮김, <한길사>, 2001.
3.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5. [세상 모든 것의 기원(The Origin of Everything)], 강인욱, <흐름출판>, 2023.
6.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7. [신의 지문 -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Fingerprints of the Gods - The Evidence of Earth's Lost Civilization)](1995), Graham Hancock, 이경덕 옮김, <까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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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Andrews with Shamela and Related Writings: A Norton Critical Edition (Paperback)
Fielding, Henry / W W Norton & Co Inc / 198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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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선언
-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1839 / [Joseph Andrews], Henry Fielding, 1741.


6개월 전 읽었던 [두 도시 이야기](1859)는 내가 읽은 찰스 디킨스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아마도 영문학사에서 19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 1812~1870)는 16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꼽히는 영국의 대표적 작가일 것인데, 막상 영문학 전공자인 나는 어릴적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을 읽은 게 그의 작품의 전부였다.

영어가 좋아서 대학의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영자 신문사를 한 달도 안되어 그만두고 이후 학부 시절 내내 영문학 공부를 하지 않았던 건, 스무살이 되어 보니 '노동계급'의 아들인 내가 '한가하게' 영어 공부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해서였다. 시대는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1980년대도 아닌, 소련이 무너진 후인 1990년대 초였지만,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승리로 인해 '계급 착취'는 더욱 고도화되고 한층 더 정교해졌다고, 나는, 그리고 '우리'라는 것이 당시에 있었다면, 소수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말이 길었질 뻔 했지만, 결국 영문학과를 다니면서도 나는 찰스 디킨스를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생각을 못했다. 한때 '사실주의' 소설에 빠지게 되었던 이십대 중후반의 시절에서 조차도 그랬다.

그러다가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는 유명한 첫 문장에 이끌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펼쳤을 때는, 난 이미 '사실주의' 소설을 언급하던 문학청년이 아니라 오십줄에 접어든 회사원 아저씨였다.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에 관한 내 서평 블로그에 찰스 디킨스 연구자 한 분이 댓글로 올린 설문에 답하는 동안, 찰스 디킨스를 읽지 못했던 영문학도인 나 자신이 아쉬워서라도 디킨스의 작품 하나는 더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던 거였다.

그렇게 고른 게,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올리버 트위스트](1839)였다.

"미덕이 어떻게 더러운 스타킹을 외면하고, 악덕이 어떻게 작은 리본들과 화려한 복장과 결혼하여, 마치 혼인한 부인들이 그 이름들을 바꾸듯이 자기 이름을 '로맨스'로 바꾸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추하고 역겨운) 것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 '우아한 취향'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전향시킬 의도가 없다. 나는 그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며, 그들의 승인을 안달하며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비천한 배경의 작품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현실에서 실재하면서 거짓 광채로 둘러싸인 무언가에 대해, 그것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실체를 보여줌로써, 그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찰스 디킨스, 1841.

1839년에 한 권의 소설로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1837년부터 2년간 한 월간지에 실렸던 연재소설의 단행본이었는데, 1841년의 <저자 서문>에서 디킨스는 이 소설과 자신의 작풍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의식한 듯 작심하고 본인의 소설관을 피력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작가 본인은 현실의 인간사를 미덕이나 교양 따위로 포장하지 않을 것이며 '추하고 역겨운' 그 모습 그대로 묘사하겠다 선언한다. 

얼핏 들으면 '사실주의(Realism) 선언' 같지만, 
사실은 '벌레스크(Burlesque) 선언'이다.

"저자의 몇몇 친구들은 이렇게 외친다. '보라, 신사 양반들이여, 주인공은 악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적이다.' 당대의 젊은 비평가들, 사무원들, 초보 견습생들은 그것을 저속하다 평하면서 한편으론 앓는 소리를 낸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중 'Henry Fielding' 인용문, 찰스 디킨스, 1841.

<저자 서문>을 시작하면서 찰스 디킨스가 인용한 작가는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 1707~1754)이다. 헨리 필딩은 '기사도' 자체를 비꼬아 버린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를 따라 당대의 고귀한 신사숙녀의 미덕을 확실하게 비틀어 버린 작가였다. 그의 소설 [조셉 앤드류스(Joseph Andrews)](1741)는 내가 대학 3학년 2학기에 수강했던 '18세기 영국소설'의 교재였고 아직 내 오랜 책장에 <노튼> 출판사의 그 원서가 있었는데, 필딩은 이 책의 <서문>에서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을 정의하고 있다. 

18세기 당시는 아직 '소설(novel)'이 본격 장르로 등장하지 않았고 고전적으로 이어져 온 '서사시(epic)'가 '희곡(drama)'처럼 '희극(comic)'과 '비극(tragedy)'으로 구분되었는데, 일종의 '산문으로 된 서사시(Epic-Poem in Prose)'로서의 '로맨스(Romance)' 중 '코믹 로맨스'는 웃기는 내용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natural)' 특징이 있다고 헨리  필딩은 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를 따라 헨리 필딩 본인이 쓴 '소설'은 그런 '자연스럽게' 읏긴 '코믹'이 아니라 특별히 '벌레스크'로 명명하고 있는데, '벌레스크(Burlesque)'가 '코믹(Comic)'과 구분되는 특징이 바로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작법이다. 상황을 묘사하되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거나 과장되게 그리면서 현실을 비웃고 비틀면서 보여주는 '사실주의'의 한 모습인 것이다.

'벌레스크(Burlesque)'는 현실을 '풍자(satire)'하는 작품이자, 우리식으로 보면 '해학극'에 해당된다.

[조셉 앤드류스]의 실제 제목은 '조셉 앤드류스와 그의 친구 에이브리엄 애덤스 씨의 모험의 역사(The History of the Adventures of Joseph Andrews and of his Friend Mr. Abraham Adams)'인데, 신사인 척 하는 주인공들의 행태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 당대 상류계층(gentry)의 위선을 보여준다. 헨리 필딩은 역시 동시대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조신한 숙녀 이야기 [파멜라(Pamela)]를 [샤멜라(Shamela)]로 패러디하여 비웃기도 한다. 정숙한 척 하는 '파멜라'를 '수줍음(Shy)' 또는 '창피함(Shame)' 같은 걸 떠는 척 하는 '샤멜라'로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벌레스크(Burlesque)'의 핵심 요소는 '패러디(Parody)'이기도 하다.

이렇게 18세기 작가 헨리 필딩의 '벌레스크(Burlesque)'를 앞세운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사실주의'가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게 된다. '자연스럽게(naural)' 그리지 않고 '해학'적으로 '풍자(satire)'하겠다는 것이다. 최대한 '부자연스럽게(un-natural)', 어색하고 과장되게 현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사실에 접근하겠다는 선언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담요 한 장에 감싸인 아기라면 어떤 사회 계급의 아기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이제 누렇게 변색된 낡은 무명옷을 입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순간에 계급이 결정되어 낙인찍혀 버렸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장>, 찰스 디킨스, 1839.

나중에 알고 보니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고귀한 몸이었지만 세상 나올 때부터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탄생 장면이다. 

또한 <2부 14장>의 제목은 '앞서 나온 상황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의 모습'인데, 거의 모든 장의 제목이 이렇게 긴 설명인 특징도 있지만 그 자체로도 현실의 패러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가 고아로 태어난 19세기 영국의 구빈원 말단 교구관리 범블 씨가 구빈원장이 되기 위해 간호부장 코니 부인을 꼬시던 이전 장과는 달리 막상 결혼 후 구박받는 모든 남편들의 평범한 모습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이라 제목을 통해 길지만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다. 어린이들의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페이긴은 시종일관 '친절한 유대인 노인'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고 여주인공 낸시의 일관된 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종국에 때려죽이는 최강 악당 사익스는 그 무슨 나라를 구한 영웅 비슷하게 용모를 묘사하기도 하는 식이다.

"... 이런 상황 전개는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인 명상거리를 던져준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훌륭한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자선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본성'은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5장>, 찰스 디킨스, 1839.

구빈원을 나와 장의사 소어베리의 집으로 팔려간 후 그 집에서 만난 자선학교 학생이자 나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는 악연인 노아로부터 비천한 고아라며 놀림을 받는 장면에서, 사실 노아는 불쌍한 자선학교에서 조차 왕따를 당하는 더더욱 불쌍한 신세지만 구빈원 고아인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노아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불우한 사람을 보면 언제든 자기가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롭혀줄 용의가 충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게 되는 '아름다운 본성'에 대해 쓰고 있다.

"비록 올리버가 '철학자들'의 손에 키워지긴 했지만, 자기보호가 자연의 제1법칙이라는 '아름다운 공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일에 잘 대비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미처 대비하지 못한 터라, 올리버는 더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0장>, 찰스 디킨스, 1839.

이런 묘사는 많은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팔아먹고 등쳐먹는 또 다른 '아름다운 본성'에 관해 논평하는 디킨스의 문장인데, 소매치기인 '미꾸라지' 일당을 따라 나가 처음 도둑질 현장을 목격하고는 무서워서 도망치는 올리버를 쫓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함께 '도둑 잡아라!'를 외치는 소매치기 '미꾸라지' 일당의 임기응변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논평의 시작에서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키운 고아원과 구빈원의 막장 인생들이 고귀한 '철학자들'로 소개되고 있다.

19세기까지 이어진 영국소설의 '벌레스크'적 전형이다.

계명대 영문과 계정민 교수는 추리소설의 계보를 논한 [범죄소설의 계보학](2018)에서 추리소설의 선조격인 범죄소설의 초기 형태로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언급하기도 한다. 

중범죄자들을 격리수감하고 교수대에 매달던 '뉴게이트' 교도소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데, 악당 사익스도 다녀온 듯 하고 페이긴은 결국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9세기 '뉴게이트 소설'이란 중범죄자들을 경계하라고 국가권력이 펴낸 범죄자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일종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역설 자체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위선을 비웃던 다수 민중들의 '벌레스크'이자 '사실주의'적 독법이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알고 보니 귀족의 자손인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 이야기로서 결국 주인공의 태생적 신분을 추적해 가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범죄소설'도, '뉴게이트 소설'도, 본격적인 '추리소설'도 아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에서 비천한 바닥생활을 하던 빈민들의 모습을 과장되고 부자연스럽지만 '패러디'와 '역설'을 통해 사실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이었던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원전의 완역본으로 읽어야 그 '벌레스크'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옮긴이 유수아 선생의 번역은 마치 원서를 읽는 듯 생생하고, 찰스 디킨스 원서의 삽화를 그린 조지 크룩생크(George Cruikshank : 1792~1878)의 삽화와 함께 읽으니 더욱 그럴 듯 하다.

***

1.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1839), Charles Dickens, 유수아 옮김, <현대지성>, 2020.
2. [Joseph Andrews & Shamela](1741), Henry Fielding, <Norton>, 1987.
3.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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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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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선언
-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1839.


6개월 전 읽었던 [두 도시 이야기](1859)는 내가 읽은 찰스 디킨스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아마도 영문학사에서 19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 1812~1870)는 16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꼽히는 영국의 대표적 작가일 것인데, 막상 영문학 전공자인 나는 어릴적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을 읽은 게 그의 작품의 전부였다.

영어가 좋아서 대학의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영자 신문사를 한 달도 안되어 그만두고 이후 학부 시절 내내 영문학 공부를 하지 않았던 건, 스무살이 되어 보니 '노동계급'의 아들인 내가 '한가하게' 영어 공부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해서였다. 시대는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1980년대도 아닌, 소련이 무너진 후인 1990년대 초였지만,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승리로 인해 '계급 착취'는 더욱 고도화되고 한층 더 정교해졌다고, 나는, 그리고 '우리'라는 것이 당시에 있었다면, 소수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말이 길었질 뻔 했지만, 결국 영문학과를 다니면서도 나는 찰스 디킨스를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생각을 못했다. 한때 '사실주의' 소설에 빠지게 되었던 이십대 중후반의 시절에서 조차도 그랬다.

그러다가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는 유명한 첫 문장에 이끌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펼쳤을 때는, 난 이미 '사실주의' 소설을 언급하던 문학청년이 아니라 오십줄에 접어든 회사원 아저씨였다.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에 관한 내 서평 블로그에 찰스 디킨스 연구자 한 분이 댓글로 올린 설문에 답하는 동안, 찰스 디킨스를 읽지 못했던 영문학도인 나 자신이 아쉬워서라도 디킨스의 작품 하나는 더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던 거였다.

그렇게 고른 게,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올리버 트위스트](1839)였다.

"미덕이 어떻게 더러운 스타킹을 외면하고, 악덕이 어떻게 작은 리본들과 화려한 복장과 결혼하여, 마치 혼인한 부인들이 그 이름들을 바꾸듯이 자기 이름을 '로맨스'로 바꾸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추하고 역겨운) 것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 '우아한 취향'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전향시킬 의도가 없다. 나는 그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며, 그들의 승인을 안달하며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비천한 배경의 작품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현실에서 실재하면서 거짓 광채로 둘러싸인 무언가에 대해, 그것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실체를 보여줌로써, 그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찰스 디킨스, 1841.

1839년에 한 권의 소설로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1837년부터 2년간 한 월간지에 실렸던 연재소설의 단행본이었는데, 1841년의 <저자 서문>에서 디킨스는 이 소설과 자신의 작풍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의식한 듯 작심하고 본인의 소설관을 피력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작가 본인은 현실의 인간사를 미덕이나 교양 따위로 포장하지 않을 것이며 '추하고 역겨운' 그 모습 그대로 묘사하겠다 선언한다. 

얼핏 들으면 '사실주의(Realism) 선언' 같지만, 
사실은 '벌레스크(Burlesque) 선언'이다.

"저자의 몇몇 친구들은 이렇게 외친다. '보라, 신사 양반들이여, 주인공은 악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적이다.' 당대의 젊은 비평가들, 사무원들, 초보 견습생들은 그것을 저속하다 평하면서 한편으론 앓는 소리를 낸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중 'Henry Fielding' 인용문, 찰스 디킨스, 1841.

<저자 서문>을 시작하면서 찰스 디킨스가 인용한 작가는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 1707~1754)이다. 헨리 필딩은 '기사도' 자체를 비꼬아 버린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를 따라 당대의 고귀한 신사숙녀의 미덕을 확실하게 비틀어 버린 작가였다. 그의 소설 [조셉 앤드류스(Joseph Andrews)](1741)는 내가 대학 3학년 2학기에 수강했던 '18세기 영국소설'의 교재였고 아직 내 오랜 책장에 <노튼> 출판사의 그 원서가 있었는데, 필딩은 이 책의 <서문>에서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을 정의하고 있다. 

18세기 당시는 아직 '소설(novel)'이 본격 장르로 등장하지 않았고 고전적으로 이어져 온 '서사시(epic)'가 '희곡(drama)'처럼 '희극(comic)'과 '비극(tragedy)'으로 구분되었는데, 일종의 '산문으로 된 서사시(Epic-Poem in Prose)'로서의 '로맨스(Romance)' 중 '코믹 로맨스'는 웃기는 내용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natural)' 특징이 있다고 헨리  필딩은 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를 따라 헨리 필딩 본인이 쓴 '소설'은 그런 '자연스럽게' 읏긴 '코믹'이 아니라 특별히 '벌레스크'로 명명하고 있는데, '벌레스크(Burlesque)'가 '코믹(Comic)'과 구분되는 특징이 바로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작법이다. 상황을 묘사하되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거나 과장되게 그리면서 현실을 비웃고 비틀면서 보여주는 '사실주의'의 한 모습인 것이다.

'벌레스크(Burlesque)'는 현실을 '풍자(satire)'하는 작품이자, 우리식으로 보면 '해학극'에 해당된다.

[조셉 앤드류스]의 실제 제목은 '조셉 앤드류스와 그의 친구 에이브리엄 애덤스 씨의 모험의 역사(The History of the Adventures of Joseph Andrews and of his Friend Mr. Abraham Adams)'인데, 신사인 척 하는 주인공들의 행태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 당대 상류계층(gentry)의 위선을 보여준다. 헨리 필딩은 역시 동시대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조신한 숙녀 이야기 [파멜라(Pamela)]를 [샤멜라(Shamela)]로 패러디하여 비웃기도 한다. 정숙한 척 하는 '파멜라'를 '수줍음(Shy)' 또는 '창피함(Shame)' 같은 걸 떠는 척 하는 '샤멜라'로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벌레스크(Burlesque)'의 핵심 요소는 '패러디(Parody)'이기도 하다.

이렇게 18세기 작가 헨리 필딩의 '벌레스크(Burlesque)'를 앞세운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사실주의'가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게 된다. '자연스럽게(naural)' 그리지 않고 '해학'적으로 '풍자(satire)'하겠다는 것이다. 최대한 '부자연스럽게(un-natural)', 어색하고 과장되게 현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사실에 접근하겠다는 선언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담요 한 장에 감싸인 아기라면 어떤 사회 계급의 아기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이제 누렇게 변색된 낡은 무명옷을 입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순간에 계급이 결정되어 낙인찍혀 버렸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장>, 찰스 디킨스, 1839.

나중에 알고 보니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고귀한 몸이었지만 세상 나올 때부터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탄생 장면이다. 

또한 <2부 14장>의 제목은 '앞서 나온 상황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의 모습'인데, 거의 모든 장의 제목이 이렇게 긴 설명인 특징도 있지만 그 자체로도 현실의 패러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가 고아로 태어난 19세기 영국의 구빈원 말단 교구관리 범블 씨가 구빈원장이 되기 위해 간호부장 코니 부인을 꼬시던 이전 장과는 달리 막상 결혼 후 구박받는 모든 남편들의 평범한 모습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이라 제목을 통해 길지만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다. 어린이들의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페이긴은 시종일관 '친절한 유대인 노인'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고 여주인공 낸시의 일관된 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종국에 때려죽이는 최강 악당 사익스는 그 무슨 나라를 구한 영웅 비슷하게 용모를 묘사하기도 하는 식이다.

"... 이런 상황 전개는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인 명상거리를 던져준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훌륭한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자선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본성'은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5장>, 찰스 디킨스, 1839.

구빈원을 나와 장의사 소어베리의 집으로 팔려간 후 그 집에서 만난 자선학교 학생이자 나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는 악연인 노아로부터 비천한 고아라며 놀림을 받는 장면에서, 사실 노아는 불쌍한 자선학교에서 조차 왕따를 당하는 더더욱 불쌍한 신세지만 구빈원 고아인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노아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불우한 사람을 보면 언제든 자기가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롭혀줄 용의가 충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게 되는 '아름다운 본성'에 대해 쓰고 있다.

"비록 올리버가 '철학자들'의 손에 키워지긴 했지만, 자기보호가 자연의 제1법칙이라는 '아름다운 공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일에 잘 대비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미처 대비하지 못한 터라, 올리버는 더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0장>, 찰스 디킨스, 1839.

이런 묘사는 많은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팔아먹고 등쳐먹는 또 다른 '아름다운 본성'에 관해 논평하는 디킨스의 문장인데, 소매치기인 '미꾸라지' 일당을 따라 나가 처음 도둑질 현장을 목격하고는 무서워서 도망치는 올리버를 쫓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함께 '도둑 잡아라!'를 외치는 소매치기 '미꾸라지' 일당의 임기응변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논평의 시작에서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키운 고아원과 구빈원의 막장 인생들이 고귀한 '철학자들'로 소개되고 있다.

19세기까지 이어진 영국소설의 '벌레스크'적 전형이다.

계명대 영문과 계정민 교수는 추리소설의 계보를 논한 [범죄소설의 계보학](2018)에서 추리소설의 선조격인 범죄소설의 초기 형태로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언급하기도 한다. 

중범죄자들을 격리수감하고 교수대에 매달던 '뉴게이트' 교도소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데, 악당 사익스도 다녀온 듯 하고 페이긴은 결국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9세기 '뉴게이트 소설'이란 중범죄자들을 경계하라고 국가권력이 펴낸 범죄자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일종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역설 자체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위선을 비웃던 다수 민중들의 '벌레스크'이자 '사실주의'적 독법이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알고 보니 귀족의 자손인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 이야기로서 결국 주인공의 태생적 신분을 추적해 가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범죄소설'도, '뉴게이트 소설'도, 본격적인 '추리소설'도 아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에서 비천한 바닥생활을 하던 빈민들의 모습을 과장되고 부자연스럽지만 '패러디'와 '역설'을 통해 사실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이었던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원전의 완역본으로 읽어야 그 '벌레스크'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옮긴이 유수아 선생의 번역은 마치 원서를 읽는 듯 생생하고, 찰스 디킨스 원서의 삽화를 그린 조지 크룩생크(George Cruikshank : 1792~1878)의 삽화와 함께 읽으니 더욱 그럴 듯 하다.

***

1.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1839), Charles Dickens, 유수아 옮김, <현대지성>, 2020.
2. [Joseph Andrews & Shamela](1741), Henry Fielding, <Norton>, 1987.
3.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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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하여 비아 제안들 시리즈
피터 브라운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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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혁명'이나...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피터 브라운, 1995.


"...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고대 후기'라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대부분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 여겼지만, 자신들의 후예들처럼 현재의 자신과 과거(이교 세계)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호한 현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부록 : 배우는 삶>, 피터 브라운, 1995.


1.

이번 대선에서 쿠데타 내란 세력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면 세상이 얼마나 바뀌게 될까,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거대 보수 양당이 반 세기 이상 지배한 우리의 정치사회 역사에서 집권당의 교체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듯 거대 양당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개표 방송을 관람하지만, 지금껏 세상을 바꿔 온 건 대다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거대 양당 중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정치를 스포츠 경기처럼 만드는 게 아니라 다수 민중들을 조직하고 스스로를 대표하게 만드는 진보정당이 언제나 필요한 이유다. 정치인 한 명의 개인기와 대표성으로 생래적 차이인 세대와 젠더를 갈라치기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채우려는 포퓰리스트들이 아무리 설쳐대도, 생물학적 차별이 아닌 사회적 계급 관계에 기초하여 다수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진보정당의 포퓰리즘은 항상 정당하다.


2.

"... 그(아우구스티누스)가 한 일은 '권위(Authority)'와 관련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주장(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승리 서사')을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은 무엇이 '이교'이며 그 영향이 교회 생활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판단할 '권위', 권한을 자신들에게 돌렸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1. 그리스도교화 - 서사와 과정>, 피터 브라운, 1995.

보통 '혁명'은 단 번에 세상을 확 바꿔 버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소비에트 혁명 등 역사적 대혁명들은 그러한 단 칼의 '승리 서사'로 기록되었는데,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과정 또한 그러하다.


'고대 후기(Late Antiquity)' 전문가인 영국 출신의 미국 역사가 피터 브라운(Peter Brown : 1935~)의 1995년 저작 [권위와 성자들(Authority and the Sacred)](1995)은 국역판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2025)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반가톨릭적 '이단'의 상상력을 담은 책 몇 권을 읽었던 탓도 있었지만 이 얇은 책을 선뜻 읽게 된 이유는 실은 국역판 제목에 끌려서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은 고대 로마 후기였던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공식화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와 같이 다신교적 전통을 이어왔던 신앙을 패배시키고, 이후 중세 유럽의 유일교이자 '보편적 종교' 즉 '가톨릭'이 되었던 '그리스도교'가 단 번에 승리했다는 '혁명'적 서사가 알고 보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리적 원천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와 같은 신학자들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전통적 이교를 단 칼에 척결한 그리스도교의 혁명적 '승리 서사'를 대표한다. 그러나 '고대 후기'는 물론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전문가로 알려진 역사가 피터 브라운은 이 책에서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바꾸어 갈 때' 결코 단 번에 '혁명'적으로 바꾼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고대 다신교를 믿던 다수 로마 민중들은 물론 신흥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배교자' 황제 등과 동떨어진 '혁명'은 없었다는 말이다. 피터 브라운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가장 빛나는 성과는 기존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제국에 맞게 과감하게 바꾸고 조합해 권력의 상징 체계를 만들어낸 것'(같은책, <1장>)이라면서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도적 전통과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현장에서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민중 문화에 스며들어 궁극에는 '고대(antiquity)' 자체를 '만악의 어머니'로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 고대 사회 대전환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고대 후기 종교 '혁명'의 주도권을 철저히 독점하고자 했다.

이 책의 원제인 [권위와 성자들] 중 그 <1장>은 '권위(Authority)'에 관한 이야기다.


"... 예측불가능한 '폭력'은 고도의 통치체제에 입각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영속적이고 통제된 '폭력'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그 '폭력'은 반드시 전통적인 상류층이 독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예측불가능한 외부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2. 불관용의 한계>, 피터 브라운, 1995.

흔히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화의 '승리 서사'는 고대의 전통적 '이교'에 대한 단호한 '불관용'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피터 브라운은 이 책의 <2장. 불관용의 한계>에서 사실 당시 로마 제국의 관심은 '종교'나 '철학' 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징세'라는 다분히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안에 있었으며, "종교 문제에서 (그리스도교의) 불관용 정책에 힘을 실어줄 여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같은책, <2장>)고 말한다. 

로마 제국의 광범위한 통치와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각 지역의 세금만 제대로 걷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황제라 해도, 그의 대리인으로서 파견된 주교 조차도, 지역의 '이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타협했다는 이야기다. 단, 이 '관용'의 주체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권력자들이어야 했기에, 다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교 신전 파괴 등의 '혁명'적 행위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 책의 <2장>에서 말하는 '불관용의 한계'는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의 단호한 '불관용'이 실은 그들의 '승리 서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한다.


"... '성자들(the Sacred)'은 큰 어려움 없이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고대 이교적) 신전을 파괴하고, 공적 제의를 강제로 폐지하는 등 거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전환 과정에서 '성자'는 지역 사람들의 자발성과 동의(헤게모니)를 끌어내는 요소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 '성자들(the Sacred)'은 하늘과 땅의 간극을 연결하는 기도의 가교가 들어설 수 있는 상상 세계를 마련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3. 거룩함의 중재자 -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의 성자>, 피터 브라운, 1995.

고대 후기 "불관용의 한계"(같은책, <2장>)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교적 타협의 현장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부들은 여전히 이분법적 '승리 서사'를 주장했지만, 각 지역의 '이교도'인 민중들과 함께 했던 '성자들(the Sacred)'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둥 위에서 살아간 4~5세기의 시메온 같은 성자들과 각종 은둔 성자들은 하느님의 유일신 세계관만이 아닌 고대의 여러 신들이 각자 천상을 분할지배한다는 다신론적 '문두스' 세계관 및 지역의 이교적 주술과 마법, 치료법 등을 받아들여 민중들과 함께 했다. 피터 브라운이 말한 '성자들(the Sacred)'은 '성인(Saint.)'과는 다르다. 피터 브라운의 '성자들'은 '순교'나 '박해' 대신 '민중들'과 함께한 수도자 또는 각지의 은둔 신부 같은 이들이었다.

결국 이 '성자들'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 스며들어 다수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 즉 '헤게모니'를 그리스도교의 '권위'에게가져다 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이 책의 원제 [권위와 성자들]에서 '성자들(the Sacred)'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승리 서사'가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피터 브라운의 책 [권위와 성자들(Authority and the Sacred)]의 국역판 제목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가 참으로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과정에서 언급되는 '승리 서사'의 허구성을 정확하게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다수의 힘과 함께 녹아들어 '마침내 바꾸어' 가는 과정이지, 단 한 번의 건곤일척 '승리 서사'가 아닌 것이다.


3.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도 난 진보정당을 지지한다.

그 어떤 '혁명'적인 상황이나 인물이라도 단 한 번의 대선으로 '승리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대 보수 양당은 다수 민중들의 의지를 독점하면서 집권 후에는 새로운 세상이나 사회 대전환으로부터 등을 돌려 왔다. 거대 양당의 유일한 목적은 장기적 정권 재창출 단 하나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하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상생 관계일 뿐이다.

그 와중에서 생래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세대나 젠더의 차이를 '혐오'와 차별의 더러운 전장으로 만들며 개인의 정치력을 확장하려는 청년 정치인은 그냥 젊은 파시스트일 뿐이다. 그 젊은이도 나이가 들 것이고 그렇게 늙은 정치인은 '태극기 부대' 못지 않게 위험하다.

노동의 현장에서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을 철폐해야 하는 진보정치 세력은 이번 대선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 항상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조건이다. 
정치란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보는 '이상'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고대 후기'가 아닌 지금의 '헤게모니'는 소수가 아닌 다수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나 '혁명'이나,
거룩하고 위대한 단 한 번의 '승리 서사'는 없다.

***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화에 관하여(Authority and the Sacred :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1995), Peter Brown, 양세규 옮김, <비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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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가면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1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최상안 옮김 / 한길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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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쇄술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구텐베르크의 가면],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8.


"Insignia Naturae Ratio Illustrat."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읽을 책이 없어 아버지 방에서 찾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를 읽다가 뒷부분 부록을 통해 출판사 <한길사>에서 발간한 책소개를 보았다. 그 속에서 역사 미스터리 추리물 작가로 보이는 독일의 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를 발견하고는 바로 호기심이 일어 그의 책을 검색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2000년도에 <한길사>에서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 두 권, 2001년에 [파라오의 음모](1990)와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 두 권, 총 네 권이 번역되어 있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는 그나마 2001년에 출판된 후자의 두 권은 품절이었다. 검색능력이 다소 미숙한 나는 사실 반덴베르크의 작품들이 각각 몇 년도에 발표되었는지 조차도 찾지를 못했는데, 어느 날 밤 동네 선배 이진 형과 술을 마시다가 내가 소개한 반덴베르크를 검색 천재 이진 형이 구글의 독일어 검색결과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까지 하면서 찾아본 결과 그의 작품들이 발표된 연혁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이미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읽고 있던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술 작품을 소재로 삼은 두 권을 구매하였고 이어서 읽어볼 예정이라 이진 형에게 추천했고, 형은 반덴베르크의 작품들 중 유독 [구텐베르크의 가면]이 끌린다고 했는데 나는 그 책은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진 형은 5천원을 내게 주면서 배송비 포함 중고책으로 대신 구매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중고 원가 1천7백원에 배송비 3천원 포함 4천7백원에 구입하고 3백원의 이문을 남긴 책이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이었던 거다.

필리프 반덴베르크가 쓴 역사 미스터리 추리소설은 일관된 주제가 있다. 
바로 로마 바티칸 교황청으로 대표되는 견고한 가톨릭 보편종교의 체제에 계속 도전했던 잊혀진 기록들과 그 비밀결사 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가톨릭의 권위는 오랜 세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은폐시켰지만, 이들은 바티칸의 지하서고에서, 바티칸의 정통 경전이 전하지 않는 '외전'에서 끊임없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중근세에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숙청당한 수많은 기사단과 어쩌면 지금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처럼 예수의 '성혈'과 '성배'를 찾으며 세계 권력의 배후로 활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시온수도회와 프리메이슨,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퇴마신부가 소속된 장미십자회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음모 단체고 반덴베르크가 배경으로 삼은 이름 모를 '이단' 조직들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천년의 왕국을 이어온 기독교의 권위가 강력했던 만큼 그에 저항한 수많은 '이단'들이 존재했음을 반증한다.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에서 '유대 카발라 신비교'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에서 단테와 다 빈치 등 시대의 천재들로 이어져 온 '오르페우스 기사단'으로 표현된 이 흐름은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에서는 '보니 호미네스(Boni Homines: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라는 단체로 등장하고 있다.

'보니 호미네스'의 비밀 은어는 'Insignia Naturae Ratio Illustrat(인시그니아 나투라이 라티오 일루스트라트)'인데, 그 의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의 라틴어다.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Ratio)으로 세계관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함께 한 '르네상스'의 인문학 정신이다.

구텐베르크는 15세기 유럽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의 개발을 통해 최초로 [성경]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궁극에는 중세 가톨릭의 견고한 성채에 커다란 균열을 낸 종교개혁 또한 가능하게 했다. 

'구텐베르크'의 본명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로서 처음에는 교황의 대리인인 독일 마인츠 지역의 대주교로부터 라틴어 성경의 대량 인쇄를 의뢰받으며 스스로를 자신의 상속 지역인 '구텐베르크'의 장인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는 이런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독일어는 물론 각국의 토착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다수 민중들에게 보급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인류의 인문학적 문명사에서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구텐베르크의 가면]의 원제는 '거울 제조업자(Der Spiegelmacher)'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구텐베르크', 즉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가 아니다. 주인공은 그의 거울 제조업 스승인 미헬 멜처인데, 나중에는 마인츠 대주교 성의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 미헬 멜처가 자신의 제자 겐스플라이슈(구텐베르크)에 의해 배신 당하고 결국 금속 인쇄기술도 빼앗기고 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내는 액자식 구성이다. 이러한 구성은 반덴베르크의 전작인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993)에서도 동일하게 채용된 서술방식이다.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걸 금지시키는 일은 소용이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마인츠에서 인쇄를 금지시킨다 해도 쾰른이나 슈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같은 다른 곳에서 인쇄할 것이므로 아무 소득이 없을 듯 하옵니다. 게다가 인쇄기술 자체는 책의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기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나쁜 것이죠. 대주교님, 1백 권이든 3백 권이든 원하시는 대로 저에게 [성서]를 인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구텐베르크의 가면], <마인츠 - 쓰라린 사랑의 고통>,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8.


원래 독일 마인츠 지방에서 납과 주석 등을 가공하여 거울을 제작하는 장인이었던 미헬 멜츠는 우연히 빛을 반사하는 거울의 기능을 신의 성광을 비추는 마술이라 사람들이 믿게 만들며 유명해졌고, 미헬 멜처의 제자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는 처음에는 스승을 사기꾼이라 비난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입장을 바꿔 함께 거울 제조업을 더 키워보자 꼬드기는데 결국 스승을 제끼고 마인츠의 거울 제조업 독점을 위해 멜처의 공장에 불을 지른다. 여차저차의 복잡한 사유로 딸 에디타와 함께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간 미헬 멜처는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그 곳에서 우연히 중국인들의 도기 활자를 이용한 인쇄기술을 배우게 되고 본인의 전공인 금속 가공 기술을 접목시켜 금속 활자를 통한 인쇄기술로 발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교황을 암살하려던 에우게니우스 교황의 조카 체자레 다 모스토의 의뢰를 받아 면죄부 10만 장을 대량 인쇄하게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필경사가 면죄부 한 장을 베껴 쓸 시간에 수백수천 장의 인쇄본을 찍는 미헬 멜처의 금속 활자 인쇄술을 '악마의 기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사연을 안고 베네치아로 도주한 멜처에게 어느 날 황야의 '예언자'를 자칭하는 수도승이 한 명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이단' 조직 '보니 호미네스'의 단장 풀허 폰 슈트라벤이었다. 여기서 다시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단골 소재인 '제5복음서'가 등장한다. 
제5차 십자군 원정 때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십자군이 흑해 인근 동굴에서 '사해 문서'와 같은 구약의 기록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예수가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기록이었던 것이고, '예슈아'로 알려진 그 실존 인물 '예수'는 본인은 '예언자'이지 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가짜 죽음 쇼까지 벌이고 도주한 후 몇 십 년을 더 살다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는 이 '제5복음서'의 기사는 정통 가톨릭의 '4대 복음서(마가-마태-루가-요한복음)'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단' 조직 '보니 호미네스'는 '제5복음서'를 담은 이 새로운 [성경]을 대량 인쇄하여 수많은 민중들에게 보급하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멜처의 금속 인쇄술을 장악하고자 한다.

결말에서는 딸은 물론 면죄부 등과 결별한 미헬 멜처가 고향인 독일의 마인츠로 돌아와서 다시금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와 동업하여 본인의 공장에서는 '제5복음서'를 비밀리에 인쇄하는 한편, 겐스플라이슈의 구텐베르크 공장에서는 마인츠 대주교의 주문을 받아 정통 [성경]을 대량 인쇄하는데, 결국 또 다시 겐스플하이슈의 배신으로 인하여 '제5복음서' 인쇄는 중단되고 인쇄술 일체를 겐스플라이슈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미헬 멜처는 '이단'의 [성경]을 인쇄했다는 이유로 감금되는데 면죄부와 '이단' 성경 등의 대량 인쇄를 의뢰받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멜처는 '인쇄술은 인쇄술일 뿐이며, 책의 내용이나 의도와 무관한 기술에 불과할 뿐'이라는 순수한 과학기술적 주장을 견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위에 인용한 '인쇄술은 책의 내용과 무관하며 인쇄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걸 나쁘게 이용하는 인간이 나쁘다'는 겐스플라이슈의 말은 스승이자 동업자인 미헬 멜처의 '제5복음서' 인쇄를 마인츠 대주교에게 밀고하며 인쇄술 독점을 꿈꾸던 그가 인쇄술이라는 '악마의 기술'을 아예 금지시키겠다는 대주교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에 대해 반박한 말이었다. 이미 인쇄술은 새로운 문명의 대세가 되었으니 그 기술의 진보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인쇄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므로 이 신문명을 이용하여 가톨릭 성서의 대량 인쇄와 보급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구텐베르크가 되고자 하는 겐스플라이슈의 의도는 금속 활자 인쇄술의 장악이었던 것이었고 가톨릭이라는 당대 최고 권위를 등에 업고 인쇄술 자체를 독점하겠다는 겐스플라이슈는 이 때부터 본인이 '구텐베르크의 장인'으로 승인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쇄술의 '창시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된다.

한편, '이단'의 [성경]을 인쇄하던 그의 스승 미헬 멜처는 마인츠의 지하 감옥에 갇히면서 수십 년 후에 오래전의 이야기를 감방벽의 뚫린 구멍을 통해 건넌방 죄수에게 구술하게 되는데, 그 시점에는 이미 배신자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 인쇄술의 '창시자'라는 명성을 남기고는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는 인쇄술의 대가는 먼저 가고, 실질적인 인쇄술의 창시자 미헬 멜처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 감방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아 지난 이야기를 남기는데 이 기록은 '제5복음서'처럼 언제 누구에게 전해질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15세기 중반 당시에는 그 주체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겐스플라이슈)였든 미헬 멜처였든,
"인쇄술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세 권을 읽어보니 '제5복음서'와 '이단'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액자식 구성의 동일한 이야기 방식에 진부함이 없지 않았는데, 1998년작 [구텐베르크의 가면]은 주인공 미헬 멜처의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를 거친 마인츠로의 여행 과정에서 전개되는 딸 에디타에 대한 부녀지간 사랑과 아름다운 여인 시모네타 등과의 애정 행각 등은 지루함을 한층 배가시키는 군더더기 같은 점이 다소 있기도 했다. 한편, 소설의 주된 내용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겐스플라이슈)의 배신과 인쇄술 독점과 장악 과정은 정작 마인츠를 다룬 마지막 장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발견한 내 취향저격 '이단' 역사소설가 필리프 반덴베르크를 알게 된 김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마지막 한 권 [파라오의 음모](1990)는 중고로 구입하여 마지막으로 더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이제 반가웠던 나의 취향저격 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해야겠다.

***

1. [구텐베르크의 가면(Der Spiegelmacher)](1998), Philipp Vandenberg, 최상안 옮김, <한길사>, 2001.
2.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4. [파라오의 음모](1990), Philipp Vandenbeg, 박계수 옮김, <한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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