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음모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5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박계수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때
- [파라오의 음모],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이제, 반덴베르크와 작별할 시간이다.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이 2025년 5월 초였으니, 이제 한달 반 정도를 그의 책을 들고 다니며 밤낮으로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책이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총 4권 뿐이니, 이제 더 함께 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에 관한 정보는 우리나라에 그리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독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다가 기자직에 잠시 종사했고, 1973년에 '파라오' 관련 소설을 처음 발표한 후 1975년부터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왔다는 그의 삶은, 실은 내가 관심있는 모든 분야가 녹아있는 삶 그 자체였다. 나도 문학을 전공했고 이십대에 소설을 쓰고 싶었으며, 미술사에 관심이 깊은데다가 하물며 어린 시절 잠시 꿈이 고고학자였다. 그리고 지금의 꿈은, 그냥 인류의 고전들을 중심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끊임없이 글도 쓰다가 또 여가로 종이접기나 하면 좋겠다는 것이니, 종이접기 취미만 뺀다면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정확히 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종이접기에 너무 매진하다가 4월 들어 갑자기 읽을 책이 궁색해졌고 그래서 들어가 보았던 아버지의 오랜 책장에서 발견한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필리프 반덴베르크를 알게 되지 못했을 거다. 아버지 책장에 있던 [세 도시 이야기]를 읽다가 그 출판사인 <한길사>의 책소개 부록에서 반덴베르크를 알게 되었으니까, 결국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인도로 만나게 된 거였다.
아버지, 잘 계시지요? ^^*

우리나라에 소개된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은 내가 읽은 순서대로 하면,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1993),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과 마지막으로 내가 읽은 [파라오의 음모](1990), 
이렇게 4권이다.

2000년도에 번역된 [미켈란젤로의 복수]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은 로마 바티칸 가톨릭 교황청이 은폐하려는 '제5복음서'의 존재를 암시하는 종교적 '이단' 이야기, 
2001년도에 번역된 [구텐베르크의 가면]과 [파라오의 음모]는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인류 문명적 '이단'에 관한 소설이다.

[성경]이 전하는 정통 '4대 복음서'와 달리,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제5복음서'의 숨은 저자처럼, 
[파라오의 음모](1990)에서도 숨어서 결코 나오지 않는 인류 문명의 '이단'적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그가 바로,
'임호테프'다.


"'임호테프'는 의사이며 설계사, 그리고 사제이면서 현자였어. 그는 기원전 2,500년, 파라오 조세르가 통치하던 때에 살았지. 그리고 피라미드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지혜론도 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는 파라오 조세르를 위해 그의 신분에 걸맞는 무덤, 즉 사카라의 계단 피라미드를 건축했단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생각하지. 이 피라미드 주위에서 고고학자들이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수많은 조각들을 발견했어. 그래서 이 근처에서 그의 묘지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곤 하지.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묘지지!"
- [파라오의 음모], <고양이 낙인의 비밀> 중 '크리스토퍼 셸리의 설명',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첫 작품이 '파라오' 관련이었다는데, 아마도 이 책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가 아닐까 나는 추측한다. 1973년에 그 동안 고대 이집트 유물 발굴과 관련하여 통속적으로 전해지던 '파라오의 저주'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썼고, 1990년에 이 작품을 수정증보한 게 아닐까 하는. 아마도 관련 정보를 더 찾지 못한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 본문이 되는 일기의 저자인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를 쫓아가게 된 마지막 장 <흔적이 끝나는 곳>의 말미가 '1990년 8월'인 것이 1973년에 예측한 미래 시간인지, 1990년에 오마르의 일지의 앞뒤로 덧붙인 소설 속 화자의 기록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내가 읽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역사추리소설 4권 모두 모종의 신비로운 화자의 회상이나 기록을 통해 본문이 전개되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일관성은 있다.

역사추리소설이라 각 이야기 속에는 실존인물들이 나온다. [파라오의 음모]에서는 이집트의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 1874~1939)가 등장한다. 영화 [미이라]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주인공처럼 대학에서 정식으로 고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17세부터 이집트로 가서 꾸준히 유적 발굴의 경험을 쌓고 1922년 결국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집토마니아' 전성기를 열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모든 고고학적 문명 유산들이 그럴 것이지만, 고대 지배계급의 무덤은 온갖 보물로 가득했을 것이고 현대 고고학자들을 후원했던 부자들의 동기가 그렇듯, 도굴은 도둑질만큼 인류의 오랜 문화적 습성이었을 게다. 실제로 하워드 카터가 고대 이집트 무덤을 발굴할 당시에도 유명한 파라오(왕)의 무덤들은 발견해 봤자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상태였고 그나마 투탕카멘 같은 요절하여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거의 없던 파라오의 무덤은 도굴꾼들 조차도 무시해버린 무덤이었다. 오랜 세월 잊혀진 유물의 문을 수천 년만에 처음 열었기에 하워드 카터와 투탕카멘이 현대에 더욱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호테프'가 등장한다.
현대의 '도굴업자'인 고고학자와 그 후원자를 비롯한 역사 속 모든 '도굴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설 [파라오의 음모] 속 주인공 오마르를 하인으로 고용하여 고고학적 경험을 겪게 해주는 영국의 학자이자 첩자 크리스토퍼 셸리가 위에서처럼 소개하듯 고대 이집트의 의사이자 건축가, 기술자인 동시에 철학자로서 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자로 알려진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무덤 속 문장을 통해 왕의 보물을 훔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무서운 주체로 나타난다.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발견 직후 감염으로 죽은 카터의 오랜 후원자 카나번 경의 이야기는 반덴베르크의 [파라오의 음모]에도 등장한다. 발굴자 카터 본인은 64세까지 살았지만 후원자 카나번의 저주받은 죽음의 배후에는 임호테프가 고대에 이미 발견한 '바이러스'가 무덤의 침입자들을 공격했다는 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였던 소설 속 배경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분할과 재분할 문제를 두고 각축을 벌이던 때다. 
소설 속 일기의 주인공 오마르 무사는 이집트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지역 출신의 낙타몰이꾼 청년으로 영국인 학자이자 첩자 크리스토퍼 셸리의 하인으로 들어가 있던 중 우연히 이집트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인 '타다만'의 고양이 낙인이 찍히게 되면서 갖은 고초 끝에 독일의 부자 노스티츠 남작의 후원 아래 실종된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를 추적하게 된다. 하트필드는 카터처럼 실존 인물이 아닌 소설 속 가상의 고고학자로서 파라오가 아닌 고대의 실질적 실력자 '임호테프'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처음 발견하여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발굴함으로써 세계 지배의 길을 열고자 했던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임호테프' 무덤의 비밀을 발견한 실종된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를 서로 먼저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만, 결국 하트필드를 찾은 건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였고, 그럼에도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설계자 '임호테프'에게로 가는 길을 막은 사람 또한 이집트인 오마르 무사가 된다.


"... 학문은 때때로 신앙이 넘어서는 것을 금하는 그런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간은 그것을 통찰할 수는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신을 믿는 인간은 자신의 불손을 억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은 인간의 근원적인 성격이죠. 구약에서 이미 인간은 신과 같이 되려고 시도했어요.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벌을 주었죠. '임호테프'는 그런 인간이었어요. 그는 신에게 받은 재능으로 인간에게 금지된 일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임호테프는 이집트 사람들이 수백년 동안 상징적인 방식으로 시도했던 것을 현실로 전환시켰죠. 즉 그의 육체 안에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생명력인 '카(영혼)'를 보유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함의 형태, 즉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죠. 그는 비밀스런 약제를 발견했어요. '박테리아', 우리 말로 하자면 '바이러스'죠. 이 문제에 있어서 고대 이집트인의 지식은 우리가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 [파라오의 음모], <피라미드의 그림자> 중 '에드워드 하트필드의 설명',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0.

필리프 반덴베르크와 같이 역시 언론인이자 기자 출신의 역사추리작가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1995)에서는 신비스럽지만 수학적으로 정확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 등 고대 문명의 비밀이 그보다 더 오랜 고대의 남극대륙으로부터 바다 건너온 선지적이고 구세주적인 문명인이 남긴 일종의 '신의 지문'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이 피라미드 같은 문명을 개척한 인물로 '임호테프(Imhotep : 기원전 26세기)'라 전해왔고, 소설 [파라오의 음모] 속 가상의 고고학자 에드워드 하트필드는 '임호테프' 무덤을 발견했다가 그 무서운 저주의 비밀을 안고 실종된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은밀하지만 치열한 첩보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 오마르와 나깁 일행이 독일 남작의 후원으로 이집트의 기독교 '이단' 단체인 '콥트교' 수도원에 갇혀있던 하트필드를 구출해 왔으나 하트필드는 그의 유산을 노리던 영국인 첩자 윌리엄 칼라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마는데, 하트필드가 죽기 전에 오마르 일당에게 했던 위와 같은 설명은 말 그대로 현대판 '임호테프'의 경고가 된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어찌 읽으면 구닥다리 같은 잠언은, 
자연과 역사 앞에 선 인간에게 교만해지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임호테프'가 '신' 또는 '자연', 아니면 '순리' 같은 것을 초월하려는 당대의 교만한 자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랬던 그의 무덤은 후세에게 교만하지 말라는 무서운 경고장 자체가 되면서 인간이 함부로 그 '신'의 영역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상징으로 남는다.
이집트인 오마르 일행은 현명하게 이 경고를 듣고 '암호테프'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았고 끝까지 그 비밀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원자인 독일 제국주의자 구스타프 노스티츠 발니츠 남작은 홀로 '임호테프' 무덤을 파내려고 하다가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만다.

'음모(Komplott)'의 주체가 '파라오(Pharao)'가 아닌 '임호테프(Imhotep)'이기에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라는 제목과는 정확히 맞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verg)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는지.

생사 조차도 알 수 없는 독일의 역사추리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역작들과 그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제, 그의 책들을 떠나 보낸다.

***

1. [파라오의 음모(Das Pharao-Komplott)](1990), Philipp Vandenbeg, 박계수 옮김, <한길사>, 2001.
2. [구텐베르크의 가면(Der Spiegelmacher)](1998), Philipp Vandenberg, 최상안 옮김, <한길사>, 2001.
3.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5. [세상 모든 것의 기원(The Origin of Everything)], 강인욱, <흐름출판>, 2023.
6.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7. [신의 지문 -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Fingerprints of the Gods - The Evidence of Earth's Lost Civilization)](1995), Graham Hancock, 이경덕 옮김, <까치>, 19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