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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하여 ㅣ 비아 제안들 시리즈
피터 브라운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5년 5월
평점 :
'종교'나, '혁명'이나...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피터 브라운, 1995.
"...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고대 후기'라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대부분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 여겼지만, 자신들의 후예들처럼 현재의 자신과 과거(이교 세계)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호한 현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부록 : 배우는 삶>, 피터 브라운, 1995.
1.
이번 대선에서 쿠데타 내란 세력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면 세상이 얼마나 바뀌게 될까,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거대 보수 양당이 반 세기 이상 지배한 우리의 정치사회 역사에서 집권당의 교체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듯 거대 양당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개표 방송을 관람하지만, 지금껏 세상을 바꿔 온 건 대다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거대 양당 중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정치를 스포츠 경기처럼 만드는 게 아니라 다수 민중들을 조직하고 스스로를 대표하게 만드는 진보정당이 언제나 필요한 이유다. 정치인 한 명의 개인기와 대표성으로 생래적 차이인 세대와 젠더를 갈라치기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채우려는 포퓰리스트들이 아무리 설쳐대도, 생물학적 차별이 아닌 사회적 계급 관계에 기초하여 다수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진보정당의 포퓰리즘은 항상 정당하다.
2.
"... 그(아우구스티누스)가 한 일은 '권위(Authority)'와 관련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주장(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승리 서사')을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은 무엇이 '이교'이며 그 영향이 교회 생활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판단할 '권위', 권한을 자신들에게 돌렸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1. 그리스도교화 - 서사와 과정>, 피터 브라운, 1995.
보통 '혁명'은 단 번에 세상을 확 바꿔 버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소비에트 혁명 등 역사적 대혁명들은 그러한 단 칼의 '승리 서사'로 기록되었는데,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과정 또한 그러하다.
'고대 후기(Late Antiquity)' 전문가인 영국 출신의 미국 역사가 피터 브라운(Peter Brown : 1935~)의 1995년 저작 [권위와 성자들(Authority and the Sacred)](1995)은 국역판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2025)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반가톨릭적 '이단'의 상상력을 담은 책 몇 권을 읽었던 탓도 있었지만 이 얇은 책을 선뜻 읽게 된 이유는 실은 국역판 제목에 끌려서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은 고대 로마 후기였던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공식화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와 같이 다신교적 전통을 이어왔던 신앙을 패배시키고, 이후 중세 유럽의 유일교이자 '보편적 종교' 즉 '가톨릭'이 되었던 '그리스도교'가 단 번에 승리했다는 '혁명'적 서사가 알고 보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리적 원천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와 같은 신학자들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전통적 이교를 단 칼에 척결한 그리스도교의 혁명적 '승리 서사'를 대표한다. 그러나 '고대 후기'는 물론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전문가로 알려진 역사가 피터 브라운은 이 책에서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바꾸어 갈 때' 결코 단 번에 '혁명'적으로 바꾼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고대 다신교를 믿던 다수 로마 민중들은 물론 신흥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배교자' 황제 등과 동떨어진 '혁명'은 없었다는 말이다. 피터 브라운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가장 빛나는 성과는 기존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제국에 맞게 과감하게 바꾸고 조합해 권력의 상징 체계를 만들어낸 것'(같은책, <1장>)이라면서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도적 전통과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현장에서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민중 문화에 스며들어 궁극에는 '고대(antiquity)' 자체를 '만악의 어머니'로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 고대 사회 대전환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고대 후기 종교 '혁명'의 주도권을 철저히 독점하고자 했다.
이 책의 원제인 [권위와 성자들] 중 그 <1장>은 '권위(Authority)'에 관한 이야기다.
"... 예측불가능한 '폭력'은 고도의 통치체제에 입각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영속적이고 통제된 '폭력'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그 '폭력'은 반드시 전통적인 상류층이 독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예측불가능한 외부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2. 불관용의 한계>, 피터 브라운, 1995.
흔히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화의 '승리 서사'는 고대의 전통적 '이교'에 대한 단호한 '불관용'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피터 브라운은 이 책의 <2장. 불관용의 한계>에서 사실 당시 로마 제국의 관심은 '종교'나 '철학' 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징세'라는 다분히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안에 있었으며, "종교 문제에서 (그리스도교의) 불관용 정책에 힘을 실어줄 여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같은책, <2장>)고 말한다.
로마 제국의 광범위한 통치와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각 지역의 세금만 제대로 걷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황제라 해도, 그의 대리인으로서 파견된 주교 조차도, 지역의 '이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타협했다는 이야기다. 단, 이 '관용'의 주체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권력자들이어야 했기에, 다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교 신전 파괴 등의 '혁명'적 행위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 책의 <2장>에서 말하는 '불관용의 한계'는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의 단호한 '불관용'이 실은 그들의 '승리 서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한다.
"... '성자들(the Sacred)'은 큰 어려움 없이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고대 이교적) 신전을 파괴하고, 공적 제의를 강제로 폐지하는 등 거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전환 과정에서 '성자'는 지역 사람들의 자발성과 동의(헤게모니)를 끌어내는 요소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 '성자들(the Sacred)'은 하늘과 땅의 간극을 연결하는 기도의 가교가 들어설 수 있는 상상 세계를 마련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3. 거룩함의 중재자 -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의 성자>, 피터 브라운, 1995.
고대 후기 "불관용의 한계"(같은책, <2장>)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교적 타협의 현장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부들은 여전히 이분법적 '승리 서사'를 주장했지만, 각 지역의 '이교도'인 민중들과 함께 했던 '성자들(the Sacred)'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둥 위에서 살아간 4~5세기의 시메온 같은 성자들과 각종 은둔 성자들은 하느님의 유일신 세계관만이 아닌 고대의 여러 신들이 각자 천상을 분할지배한다는 다신론적 '문두스' 세계관 및 지역의 이교적 주술과 마법, 치료법 등을 받아들여 민중들과 함께 했다. 피터 브라운이 말한 '성자들(the Sacred)'은 '성인(Saint.)'과는 다르다. 피터 브라운의 '성자들'은 '순교'나 '박해' 대신 '민중들'과 함께한 수도자 또는 각지의 은둔 신부 같은 이들이었다.
결국 이 '성자들'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 스며들어 다수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 즉 '헤게모니'를 그리스도교의 '권위'에게가져다 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이 책의 원제 [권위와 성자들]에서 '성자들(the Sacred)'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승리 서사'가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피터 브라운의 책 [권위와 성자들(Authority and the Sacred)]의 국역판 제목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가 참으로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은,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과정에서 언급되는 '승리 서사'의 허구성을 정확하게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다수의 힘과 함께 녹아들어 '마침내 바꾸어' 가는 과정이지, 단 한 번의 건곤일척 '승리 서사'가 아닌 것이다.
3.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도 난 진보정당을 지지한다.
그 어떤 '혁명'적인 상황이나 인물이라도 단 한 번의 대선으로 '승리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대 보수 양당은 다수 민중들의 의지를 독점하면서 집권 후에는 새로운 세상이나 사회 대전환으로부터 등을 돌려 왔다. 거대 양당의 유일한 목적은 장기적 정권 재창출 단 하나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하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상생 관계일 뿐이다.
그 와중에서 생래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세대나 젠더의 차이를 '혐오'와 차별의 더러운 전장으로 만들며 개인의 정치력을 확장하려는 청년 정치인은 그냥 젊은 파시스트일 뿐이다. 그 젊은이도 나이가 들 것이고 그렇게 늙은 정치인은 '태극기 부대' 못지 않게 위험하다.
노동의 현장에서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을 철폐해야 하는 진보정치 세력은 이번 대선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 항상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조건이다.
정치란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보는 '이상'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고대 후기'가 아닌 지금의 '헤게모니'는 소수가 아닌 다수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나 '혁명'이나,
거룩하고 위대한 단 한 번의 '승리 서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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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화에 관하여(Authority and the Sacred :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1995), Peter Brown, 양세규 옮김, <비아>,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