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텐베르크의 가면 ㅣ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1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최상안 옮김 / 한길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인쇄술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구텐베르크의 가면],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8.
"Insignia Naturae Ratio Illustrat."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읽을 책이 없어 아버지 방에서 찾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를 읽다가 뒷부분 부록을 통해 출판사 <한길사>에서 발간한 책소개를 보았다. 그 속에서 역사 미스터리 추리물 작가로 보이는 독일의 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를 발견하고는 바로 호기심이 일어 그의 책을 검색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2000년도에 <한길사>에서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 두 권, 2001년에 [파라오의 음모](1990)와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 두 권, 총 네 권이 번역되어 있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는 그나마 2001년에 출판된 후자의 두 권은 품절이었다. 검색능력이 다소 미숙한 나는 사실 반덴베르크의 작품들이 각각 몇 년도에 발표되었는지 조차도 찾지를 못했는데, 어느 날 밤 동네 선배 이진 형과 술을 마시다가 내가 소개한 반덴베르크를 검색 천재 이진 형이 구글의 독일어 검색결과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까지 하면서 찾아본 결과 그의 작품들이 발표된 연혁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이미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읽고 있던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술 작품을 소재로 삼은 두 권을 구매하였고 이어서 읽어볼 예정이라 이진 형에게 추천했고, 형은 반덴베르크의 작품들 중 유독 [구텐베르크의 가면]이 끌린다고 했는데 나는 그 책은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진 형은 5천원을 내게 주면서 배송비 포함 중고책으로 대신 구매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중고 원가 1천7백원에 배송비 3천원 포함 4천7백원에 구입하고 3백원의 이문을 남긴 책이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이었던 거다.
필리프 반덴베르크가 쓴 역사 미스터리 추리소설은 일관된 주제가 있다.
바로 로마 바티칸 교황청으로 대표되는 견고한 가톨릭 보편종교의 체제에 계속 도전했던 잊혀진 기록들과 그 비밀결사 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가톨릭의 권위는 오랜 세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은폐시켰지만, 이들은 바티칸의 지하서고에서, 바티칸의 정통 경전이 전하지 않는 '외전'에서 끊임없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중근세에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숙청당한 수많은 기사단과 어쩌면 지금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처럼 예수의 '성혈'과 '성배'를 찾으며 세계 권력의 배후로 활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시온수도회와 프리메이슨,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퇴마신부가 소속된 장미십자회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음모 단체고 반덴베르크가 배경으로 삼은 이름 모를 '이단' 조직들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천년의 왕국을 이어온 기독교의 권위가 강력했던 만큼 그에 저항한 수많은 '이단'들이 존재했음을 반증한다.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에서 '유대 카발라 신비교'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에서 단테와 다 빈치 등 시대의 천재들로 이어져 온 '오르페우스 기사단'으로 표현된 이 흐름은 [구텐베르크의 가면](1998)에서는 '보니 호미네스(Boni Homines: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라는 단체로 등장하고 있다.
'보니 호미네스'의 비밀 은어는 'Insignia Naturae Ratio Illustrat(인시그니아 나투라이 라티오 일루스트라트)'인데, 그 의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의 라틴어다.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Ratio)으로 세계관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함께 한 '르네상스'의 인문학 정신이다.
구텐베르크는 15세기 유럽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의 개발을 통해 최초로 [성경]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궁극에는 중세 가톨릭의 견고한 성채에 커다란 균열을 낸 종교개혁 또한 가능하게 했다.
'구텐베르크'의 본명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로서 처음에는 교황의 대리인인 독일 마인츠 지역의 대주교로부터 라틴어 성경의 대량 인쇄를 의뢰받으며 스스로를 자신의 상속 지역인 '구텐베르크'의 장인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는 이런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독일어는 물론 각국의 토착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다수 민중들에게 보급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인류의 인문학적 문명사에서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구텐베르크의 가면]의 원제는 '거울 제조업자(Der Spiegelmacher)'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구텐베르크', 즉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가 아니다. 주인공은 그의 거울 제조업 스승인 미헬 멜처인데, 나중에는 마인츠 대주교 성의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 미헬 멜처가 자신의 제자 겐스플라이슈(구텐베르크)에 의해 배신 당하고 결국 금속 인쇄기술도 빼앗기고 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내는 액자식 구성이다. 이러한 구성은 반덴베르크의 전작인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993)에서도 동일하게 채용된 서술방식이다.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걸 금지시키는 일은 소용이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마인츠에서 인쇄를 금지시킨다 해도 쾰른이나 슈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같은 다른 곳에서 인쇄할 것이므로 아무 소득이 없을 듯 하옵니다. 게다가 인쇄기술 자체는 책의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기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나쁜 것이죠. 대주교님, 1백 권이든 3백 권이든 원하시는 대로 저에게 [성서]를 인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구텐베르크의 가면], <마인츠 - 쓰라린 사랑의 고통>,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8.
원래 독일 마인츠 지방에서 납과 주석 등을 가공하여 거울을 제작하는 장인이었던 미헬 멜츠는 우연히 빛을 반사하는 거울의 기능을 신의 성광을 비추는 마술이라 사람들이 믿게 만들며 유명해졌고, 미헬 멜처의 제자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는 처음에는 스승을 사기꾼이라 비난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입장을 바꿔 함께 거울 제조업을 더 키워보자 꼬드기는데 결국 스승을 제끼고 마인츠의 거울 제조업 독점을 위해 멜처의 공장에 불을 지른다. 여차저차의 복잡한 사유로 딸 에디타와 함께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간 미헬 멜처는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그 곳에서 우연히 중국인들의 도기 활자를 이용한 인쇄기술을 배우게 되고 본인의 전공인 금속 가공 기술을 접목시켜 금속 활자를 통한 인쇄기술로 발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교황을 암살하려던 에우게니우스 교황의 조카 체자레 다 모스토의 의뢰를 받아 면죄부 10만 장을 대량 인쇄하게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필경사가 면죄부 한 장을 베껴 쓸 시간에 수백수천 장의 인쇄본을 찍는 미헬 멜처의 금속 활자 인쇄술을 '악마의 기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사연을 안고 베네치아로 도주한 멜처에게 어느 날 황야의 '예언자'를 자칭하는 수도승이 한 명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이단' 조직 '보니 호미네스'의 단장 풀허 폰 슈트라벤이었다. 여기서 다시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단골 소재인 '제5복음서'가 등장한다.
제5차 십자군 원정 때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십자군이 흑해 인근 동굴에서 '사해 문서'와 같은 구약의 기록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예수가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기록이었던 것이고, '예슈아'로 알려진 그 실존 인물 '예수'는 본인은 '예언자'이지 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가짜 죽음 쇼까지 벌이고 도주한 후 몇 십 년을 더 살다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는 이 '제5복음서'의 기사는 정통 가톨릭의 '4대 복음서(마가-마태-루가-요한복음)'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단' 조직 '보니 호미네스'는 '제5복음서'를 담은 이 새로운 [성경]을 대량 인쇄하여 수많은 민중들에게 보급하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멜처의 금속 인쇄술을 장악하고자 한다.
결말에서는 딸은 물론 면죄부 등과 결별한 미헬 멜처가 고향인 독일의 마인츠로 돌아와서 다시금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와 동업하여 본인의 공장에서는 '제5복음서'를 비밀리에 인쇄하는 한편, 겐스플라이슈의 구텐베르크 공장에서는 마인츠 대주교의 주문을 받아 정통 [성경]을 대량 인쇄하는데, 결국 또 다시 겐스플하이슈의 배신으로 인하여 '제5복음서' 인쇄는 중단되고 인쇄술 일체를 겐스플라이슈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미헬 멜처는 '이단'의 [성경]을 인쇄했다는 이유로 감금되는데 면죄부와 '이단' 성경 등의 대량 인쇄를 의뢰받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멜처는 '인쇄술은 인쇄술일 뿐이며, 책의 내용이나 의도와 무관한 기술에 불과할 뿐'이라는 순수한 과학기술적 주장을 견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위에 인용한 '인쇄술은 책의 내용과 무관하며 인쇄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걸 나쁘게 이용하는 인간이 나쁘다'는 겐스플라이슈의 말은 스승이자 동업자인 미헬 멜처의 '제5복음서' 인쇄를 마인츠 대주교에게 밀고하며 인쇄술 독점을 꿈꾸던 그가 인쇄술이라는 '악마의 기술'을 아예 금지시키겠다는 대주교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에 대해 반박한 말이었다. 이미 인쇄술은 새로운 문명의 대세가 되었으니 그 기술의 진보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인쇄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므로 이 신문명을 이용하여 가톨릭 성서의 대량 인쇄와 보급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구텐베르크가 되고자 하는 겐스플라이슈의 의도는 금속 활자 인쇄술의 장악이었던 것이었고 가톨릭이라는 당대 최고 권위를 등에 업고 인쇄술 자체를 독점하겠다는 겐스플라이슈는 이 때부터 본인이 '구텐베르크의 장인'으로 승인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쇄술의 '창시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된다.
한편, '이단'의 [성경]을 인쇄하던 그의 스승 미헬 멜처는 마인츠의 지하 감옥에 갇히면서 수십 년 후에 오래전의 이야기를 감방벽의 뚫린 구멍을 통해 건넌방 죄수에게 구술하게 되는데, 그 시점에는 이미 배신자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 인쇄술의 '창시자'라는 명성을 남기고는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는 인쇄술의 대가는 먼저 가고, 실질적인 인쇄술의 창시자 미헬 멜처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 감방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아 지난 이야기를 남기는데 이 기록은 '제5복음서'처럼 언제 누구에게 전해질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15세기 중반 당시에는 그 주체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겐스플라이슈)였든 미헬 멜처였든,
"인쇄술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세 권을 읽어보니 '제5복음서'와 '이단'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액자식 구성의 동일한 이야기 방식에 진부함이 없지 않았는데, 1998년작 [구텐베르크의 가면]은 주인공 미헬 멜처의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를 거친 마인츠로의 여행 과정에서 전개되는 딸 에디타에 대한 부녀지간 사랑과 아름다운 여인 시모네타 등과의 애정 행각 등은 지루함을 한층 배가시키는 군더더기 같은 점이 다소 있기도 했다. 한편, 소설의 주된 내용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겐스플라이슈)의 배신과 인쇄술 독점과 장악 과정은 정작 마인츠를 다룬 마지막 장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발견한 내 취향저격 '이단' 역사소설가 필리프 반덴베르크를 알게 된 김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마지막 한 권 [파라오의 음모](1990)는 중고로 구입하여 마지막으로 더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이제 반가웠던 나의 취향저격 작가 필리프 반덴베르크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해야겠다.
***
1. [구텐베르크의 가면(Der Spiegelmacher)](1998), Philipp Vandenberg, 최상안 옮김, <한길사>, 2001.
2.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4. [파라오의 음모](1990), Philipp Vandenbeg, 박계수 옮김, <한길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