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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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선언
-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1839.


6개월 전 읽었던 [두 도시 이야기](1859)는 내가 읽은 찰스 디킨스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아마도 영문학사에서 19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 1812~1870)는 16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꼽히는 영국의 대표적 작가일 것인데, 막상 영문학 전공자인 나는 어릴적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을 읽은 게 그의 작품의 전부였다.

영어가 좋아서 대학의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영자 신문사를 한 달도 안되어 그만두고 이후 학부 시절 내내 영문학 공부를 하지 않았던 건, 스무살이 되어 보니 '노동계급'의 아들인 내가 '한가하게' 영어 공부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해서였다. 시대는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1980년대도 아닌, 소련이 무너진 후인 1990년대 초였지만,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승리로 인해 '계급 착취'는 더욱 고도화되고 한층 더 정교해졌다고, 나는, 그리고 '우리'라는 것이 당시에 있었다면, 소수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말이 길었질 뻔 했지만, 결국 영문학과를 다니면서도 나는 찰스 디킨스를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생각을 못했다. 한때 '사실주의' 소설에 빠지게 되었던 이십대 중후반의 시절에서 조차도 그랬다.

그러다가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는 유명한 첫 문장에 이끌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펼쳤을 때는, 난 이미 '사실주의' 소설을 언급하던 문학청년이 아니라 오십줄에 접어든 회사원 아저씨였다.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에 관한 내 서평 블로그에 찰스 디킨스 연구자 한 분이 댓글로 올린 설문에 답하는 동안, 찰스 디킨스를 읽지 못했던 영문학도인 나 자신이 아쉬워서라도 디킨스의 작품 하나는 더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던 거였다.

그렇게 고른 게,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올리버 트위스트](1839)였다.

"미덕이 어떻게 더러운 스타킹을 외면하고, 악덕이 어떻게 작은 리본들과 화려한 복장과 결혼하여, 마치 혼인한 부인들이 그 이름들을 바꾸듯이 자기 이름을 '로맨스'로 바꾸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추하고 역겨운) 것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 '우아한 취향'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전향시킬 의도가 없다. 나는 그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며, 그들의 승인을 안달하며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비천한 배경의 작품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현실에서 실재하면서 거짓 광채로 둘러싸인 무언가에 대해, 그것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실체를 보여줌로써, 그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찰스 디킨스, 1841.

1839년에 한 권의 소설로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1837년부터 2년간 한 월간지에 실렸던 연재소설의 단행본이었는데, 1841년의 <저자 서문>에서 디킨스는 이 소설과 자신의 작풍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의식한 듯 작심하고 본인의 소설관을 피력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작가 본인은 현실의 인간사를 미덕이나 교양 따위로 포장하지 않을 것이며 '추하고 역겨운' 그 모습 그대로 묘사하겠다 선언한다. 

얼핏 들으면 '사실주의(Realism) 선언' 같지만, 
사실은 '벌레스크(Burlesque) 선언'이다.

"저자의 몇몇 친구들은 이렇게 외친다. '보라, 신사 양반들이여, 주인공은 악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적이다.' 당대의 젊은 비평가들, 사무원들, 초보 견습생들은 그것을 저속하다 평하면서 한편으론 앓는 소리를 낸다."
- [올리버 트위스트], <저자 서문> 중 'Henry Fielding' 인용문, 찰스 디킨스, 1841.

<저자 서문>을 시작하면서 찰스 디킨스가 인용한 작가는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 1707~1754)이다. 헨리 필딩은 '기사도' 자체를 비꼬아 버린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를 따라 당대의 고귀한 신사숙녀의 미덕을 확실하게 비틀어 버린 작가였다. 그의 소설 [조셉 앤드류스(Joseph Andrews)](1741)는 내가 대학 3학년 2학기에 수강했던 '18세기 영국소설'의 교재였고 아직 내 오랜 책장에 <노튼> 출판사의 그 원서가 있었는데, 필딩은 이 책의 <서문>에서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을 정의하고 있다. 

18세기 당시는 아직 '소설(novel)'이 본격 장르로 등장하지 않았고 고전적으로 이어져 온 '서사시(epic)'가 '희곡(drama)'처럼 '희극(comic)'과 '비극(tragedy)'으로 구분되었는데, 일종의 '산문으로 된 서사시(Epic-Poem in Prose)'로서의 '로맨스(Romance)' 중 '코믹 로맨스'는 웃기는 내용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natural)' 특징이 있다고 헨리  필딩은 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를 따라 헨리 필딩 본인이 쓴 '소설'은 그런 '자연스럽게' 읏긴 '코믹'이 아니라 특별히 '벌레스크'로 명명하고 있는데, '벌레스크(Burlesque)'가 '코믹(Comic)'과 구분되는 특징이 바로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작법이다. 상황을 묘사하되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거나 과장되게 그리면서 현실을 비웃고 비틀면서 보여주는 '사실주의'의 한 모습인 것이다.

'벌레스크(Burlesque)'는 현실을 '풍자(satire)'하는 작품이자, 우리식으로 보면 '해학극'에 해당된다.

[조셉 앤드류스]의 실제 제목은 '조셉 앤드류스와 그의 친구 에이브리엄 애덤스 씨의 모험의 역사(The History of the Adventures of Joseph Andrews and of his Friend Mr. Abraham Adams)'인데, 신사인 척 하는 주인공들의 행태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 당대 상류계층(gentry)의 위선을 보여준다. 헨리 필딩은 역시 동시대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조신한 숙녀 이야기 [파멜라(Pamela)]를 [샤멜라(Shamela)]로 패러디하여 비웃기도 한다. 정숙한 척 하는 '파멜라'를 '수줍음(Shy)' 또는 '창피함(Shame)' 같은 걸 떠는 척 하는 '샤멜라'로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벌레스크(Burlesque)'의 핵심 요소는 '패러디(Parody)'이기도 하다.

이렇게 18세기 작가 헨리 필딩의 '벌레스크(Burlesque)'를 앞세운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사실주의'가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게 된다. '자연스럽게(naural)' 그리지 않고 '해학'적으로 '풍자(satire)'하겠다는 것이다. 최대한 '부자연스럽게(un-natural)', 어색하고 과장되게 현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사실에 접근하겠다는 선언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담요 한 장에 감싸인 아기라면 어떤 사회 계급의 아기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이제 누렇게 변색된 낡은 무명옷을 입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순간에 계급이 결정되어 낙인찍혀 버렸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장>, 찰스 디킨스, 1839.

나중에 알고 보니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고귀한 몸이었지만 세상 나올 때부터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탄생 장면이다. 

또한 <2부 14장>의 제목은 '앞서 나온 상황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의 모습'인데, 거의 모든 장의 제목이 이렇게 긴 설명인 특징도 있지만 그 자체로도 현실의 패러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가 고아로 태어난 19세기 영국의 구빈원 말단 교구관리 범블 씨가 구빈원장이 되기 위해 간호부장 코니 부인을 꼬시던 이전 장과는 달리 막상 결혼 후 구박받는 모든 남편들의 평범한 모습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그리 드물지 않은 결혼생활'이라 제목을 통해 길지만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다. 어린이들의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페이긴은 시종일관 '친절한 유대인 노인'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고 여주인공 낸시의 일관된 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종국에 때려죽이는 최강 악당 사익스는 그 무슨 나라를 구한 영웅 비슷하게 용모를 묘사하기도 하는 식이다.

"... 이런 상황 전개는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인 명상거리를 던져준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훌륭한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자선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본성'은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5장>, 찰스 디킨스, 1839.

구빈원을 나와 장의사 소어베리의 집으로 팔려간 후 그 집에서 만난 자선학교 학생이자 나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는 악연인 노아로부터 비천한 고아라며 놀림을 받는 장면에서, 사실 노아는 불쌍한 자선학교에서 조차 왕따를 당하는 더더욱 불쌍한 신세지만 구빈원 고아인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노아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불우한 사람을 보면 언제든 자기가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롭혀줄 용의가 충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게 되는 '아름다운 본성'에 대해 쓰고 있다.

"비록 올리버가 '철학자들'의 손에 키워지긴 했지만, 자기보호가 자연의 제1법칙이라는 '아름다운 공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일에 잘 대비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미처 대비하지 못한 터라, 올리버는 더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올리버 트위스트], <1부 10장>, 찰스 디킨스, 1839.

이런 묘사는 많은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팔아먹고 등쳐먹는 또 다른 '아름다운 본성'에 관해 논평하는 디킨스의 문장인데, 소매치기인 '미꾸라지' 일당을 따라 나가 처음 도둑질 현장을 목격하고는 무서워서 도망치는 올리버를 쫓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함께 '도둑 잡아라!'를 외치는 소매치기 '미꾸라지' 일당의 임기응변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논평의 시작에서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키운 고아원과 구빈원의 막장 인생들이 고귀한 '철학자들'로 소개되고 있다.

19세기까지 이어진 영국소설의 '벌레스크'적 전형이다.

계명대 영문과 계정민 교수는 추리소설의 계보를 논한 [범죄소설의 계보학](2018)에서 추리소설의 선조격인 범죄소설의 초기 형태로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언급하기도 한다. 

중범죄자들을 격리수감하고 교수대에 매달던 '뉴게이트' 교도소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데, 악당 사익스도 다녀온 듯 하고 페이긴은 결국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9세기 '뉴게이트 소설'이란 중범죄자들을 경계하라고 국가권력이 펴낸 범죄자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일종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역설 자체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위선을 비웃던 다수 민중들의 '벌레스크'이자 '사실주의'적 독법이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알고 보니 귀족의 자손인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 이야기로서 결국 주인공의 태생적 신분을 추적해 가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범죄소설'도, '뉴게이트 소설'도, 본격적인 '추리소설'도 아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에서 비천한 바닥생활을 하던 빈민들의 모습을 과장되고 부자연스럽지만 '패러디'와 '역설'을 통해 사실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실주의'적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이었던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원전의 완역본으로 읽어야 그 '벌레스크'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옮긴이 유수아 선생의 번역은 마치 원서를 읽는 듯 생생하고, 찰스 디킨스 원서의 삽화를 그린 조지 크룩생크(George Cruikshank : 1792~1878)의 삽화와 함께 읽으니 더욱 그럴 듯 하다.

***

1.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1839), Charles Dickens, 유수아 옮김, <현대지성>, 2020.
2. [Joseph Andrews & Shamela](1741), Henry Fielding, <Norton>, 1987.
3.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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