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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 지음, 이주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12월
평점 :
'사힙키란'의 전설이 된 '티무르'
- [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야즈디, 1424.
"'사힙키란(티무르)'은 그간 여러 왕과 하킴의 갈등과 반목, 노상 강도와 악당들의 선동으로 인해 혼돈에 빠진 이 세계를 바꾸고 치료하기 위해 여러 왕국을 정복했다. 이에 세계가 평안과 안정의 상태에 접어들어 동서간의 왕래가 편안하고 안전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해를 입고 흩어졌다. 이에 그는 이교도의 땅인 중국으로 가서 불교 사찰과 조로아스터교 성전을 모스크로 대체하면 죄악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 [티무르 승전기], <에필로그: 중국 정벌의 꿈과 사후의 혼란>, 샤라프 야즈디, 1424.
1404년 '라마단월 14일 수요일(3월 26일), '세계정복자'인 '사힙키란(Sahib-Qiran)' 티무르(Timur:1336~1405)가 동방의 중국 명(明)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서방의 이란 '7년 원정'을 마무리하고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출발했을 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칭기스 칸 사후 12~14세기 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몽골 제국은 북쪽의 '주치울루스(킵차크-칸국)', 남서쪽의 '훌레구울루스(일-칸국)', 동쪽의 '원나라(오고타이-칸국)', 그리고 중앙의 '차카타이울루스(차카타이-칸국)'로 크게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울루스 키시에서 1336년에 태어난 티무르는 당시의 수많은 이슬람 장군 '아미르' 중 하나였지만, 1370년 34세에 차카타이울루스 일대를 장악하고 통일했다.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티무르 왕은 주변 영토를 공략하는 단기 정복 전쟁(1370~1386) 이후 서방의 이라크 바그다드와 이란(페르시아) 지역으로 '3년 원정(1386~1388)'과 '5년 원정(1392~1396)'을 수행하고, 칭기스 칸도 건너지 못했던 북인도 인더스 강을 건너 델리를 장악했으며, 그의 마지막 장기 원정인 이란 '7년 원정(1399~1405)' 이후 동쪽의 중국 명나라 영락제와 일전을 치르기 직전 사망한다.
'7년 원정' 기간에 '앙카라 전투'에서 '유럽의 적'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를 포로로 잡은 티무르는 유럽인(프랑크)들에게 칭기스 칸의 뒤를 잇는 동방에서 온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페르시아어 기록에는 없어 실제로 절름발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 중 숱하게 부상을 입었던 듯한 티무르는 유럽인에게 '절름발이 티무르(Tamerlane)'로 더욱 기이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단다.
오랜 시간이 지난 20세기, '강철(Steel)'을 뜻하는 가명의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Stalin)'이, 역시 '세계정복자'를 꿈꾸었는지, 5백년 전에 죽은 '티무르'의 무덤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전해진다. 결국 스탈린이 티무르의 무덤을 파내어 그의 시신을 보고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칭기스 칸은 물론 알렉산더와 예수 못지 않게 강력한 '세계정복자' 중 하나로 꼽히는 '티무르'라는 이름 역시 '강철'을 의미한다.
실제로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의 뒤를 잇는 아시아의 거대 제국을 표방하며 14~15세기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역할을 했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의 사신들은 실제로는 교역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티무르의 정복 후 각국에 보낸 편지들은 '교역의 자유'를 강요하는 내용 일색이었다고 한다. '키타이(거란)'로 부르던 중국 명나라 정벌도 사실은 '이교도 정벌'이 아니라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1328~1398)이 중국 서쪽에서 교역하던 '회회족(무슬림)'을 박해했기 때문에 결의한 것이었다.
역시,
역사에서 모든 정치 행위의 토대는 경제 관계다.
"당시 티무르가 정복한 최대 영역은, 동쪽으로는 현 중국 신장 카리호자와 이르티시강 유역,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서단의 이즈미르, 북쪽으로는 모스크바와 키예프, 남쪽으로는 북인도 델리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영역이 티무르 생전에 전부 정복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차지한 후, 티무르는 여러 지식인에게 명을 내려 자신의 공적을 담은 사서(史書)를 저술하게 했다. 그의 후손들도 국가의 시조인 티무르의 '승전(勝戰)'을 담은 사서 저술을 후원했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의 [승전기(勝戰記/Zafar-nama)]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쿠레겐과 사힙키란, 티무르의 두 칭호>, 이주연, 2025.
서아시아(페르시아) 이슬람사를 전공한 학자 이주연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 티무르의 일생을 담은 [승전기]에 관한 연구였다는데, 이 책은 티무르의 손자 이브라힘 술탄의 명을 받아 티무르 왕조의 정당성을 기록한 어용 역사서로서, 15세기 이란 중서부 '야즈드' 출신의 학자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가 저술한 [티무르 승전기](1424)였다.
이주연 선생은 야즈디의 [승전기]를 대중적으로 편역한 [티무르 승전기](<사계절>, 2025)의 <해제>를 통해, 14세기 '세계정복자'로서의 '사힙키란' 티무르와 그의 일생에 걸친 '정복기'로서 15세기 샤라프 야즈디의 [승전기]의 사료적 가치를 설명해 준다.
이에 의하면, 티무르는 수십년 간의 정복 과정에서 약 1,700만 명을 살육함으로써 칭기스 칸 못지 않게 잔혹한 정벌을 했지만, 칭기스 칸처럼 미리 알아서 항복한 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 등 문화 발전을 지지했다.
'역사학'을 사회과학적으로서 처음으로 다루었다는 [무깟디마(역사서설)]의 저자인 저명한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을 한 번 불러 독대하기도 했다는 티무르는 예언가 학자 '사이드(sayyid)'인 베케르를 평생 존경했고 '키탑하나'라는 '도서관'에 지식인들을 모아 역사 저술을 장려했단다.
그의 원정을 따라다닌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실록'을 기록한 '1차 사료'를 남겼고, 티무르 당대의 '2차 사료'로서 집단적 편집발췌를 거친 니잠 앗딘 샤미의 [승전기](1402)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티무르 왕조의 역사서라고 한다.
샤라프 야즈디의 [승전기](1424)는 티무르 사후 그의 손자인 이브라힘 술탄의 지시로, 전술한 샤미의 [승전기](1402)를 저본으로 삼아 더욱 구체적으로 보완한 '3차 사료'에 해당한다.
야즈디는 본인이 저술한 이 [티무르 승전기]를 선대 역사가 이븐 할둔을 따라 '무깟디마(서론)'로 일컫는데, 티무르의 후계자인 넷째 아들 샤루흐의 '승전기'와 그의 아들 이브라힘 술탄의 '승전기'를 각 '2권'과 '3권'으로 이어서 저술했다고 한다.
'2권'은 사본 하나가 남았고, '3권'은 야즈디 [승전기]의 러시아 연구자 바실리 바르톨트가 읽었다는 기록만이 남았다.
"행정체계를 갖지 못한 아랍계 무슬림 지배자 정권에서 페르시아의 체계적 행정 시스템을 무기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한 페르시아의 서기 계층과, 독자적 기록체계가 없던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위구르 문자 및 행정능력을 이용하여 각종 실무를 담당했던 위구르 서기 계층, 아시아의 동과 서에서 '식자(識者:Men of Letter/Ahl-i Kalam)'이자 문인(文人)이던 이들이 티무르 제국이라는 국가 안에 공존하며 역사기록을 담당한 것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야즈디 [승전기]의 사료적 가치 재고>, 이주연, 2025.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은 독자적 기록체계가 없었는데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 위구르인들이 몽골 제국의 지식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이슬람 '성전(聖戰)'을 앞세운 무슬림 군벌(아미르)들 또한 독립적 행정체계가 부족하여 오랜 문명 전통을 가진 페르시아인들이 무슬림 정권의 지식인 역할을 했다.
이란 중서부 '야즈드(Yazd)' 출신의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Yazdi)' 또한 페르시아 출신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슬람 스승들로부터 천문학과 수비술(숫자신비술), 문자학(기호신비학), 메시아니즘(구세주주의) 등의 당대 신비주의 '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이슬람 신의 가호를 입은 티무르의 '세계정복'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과연 [승전기] 속 티무르는 신의 힘으로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천하무적의 신장(神將)이다.
"티무르가 스스로를 '몽골제국의 부마'를 의미하는 '쿠레겐'이라 칭한 것도, 유럽인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인상을 이용한 전략이라 볼 수 있다...
티무르가 군주적 정통성(사서)을 선전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반대로 이전 군주들이 내세운 정통성의 근거를 통해서는 적법한 군주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반증한다. 티무르조가 성립된 14세기 후반은 '칼리프가 임명한 군주'라는 이슬람적 정통성이나,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몽골 제국의 정통성이 모두 쇠퇴하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 칭기스 일족도 아니고, 칼리프에게 승인받을 수도 없던 티무르가 내세운 새로운 유형의 정통성이 곧 '사힙키란(Sahib-Qiran:세계정복자)'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쿠레겐과 사힙키란, 티무르의 두 칭호>, 이주연, 2025.
그렇게 티무르는 야즈디의 [승전기] 내내 '사힙키란(Sahib-Qiran)'으로 불린다.
본래 고대로부터 이슬람 군주들이 표방해 왔다는 '사힙키란'은 신비주의 천문학인 점성술에 따라 목성과 토성이 합쳐지는 날에 태어난 최적 '합(合:Qiran)'의 군주를 의미하는데, '사힙키란'은 '세계정복자'의 이슬람적 보통명사였지만 야즈디의 [승전기]에 의해 '세계정복자' 티무르 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차카타이울루스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영역을 급속도로 넓힌 티무르 초기에는 예전 몽골 제국의 후광이 필요했기에, 초기의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앞에 내세우고 본인은 이 '황금씨족'의 '부마(쿠레겐:외척)'가 되어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몽골 세계제국의 전 영역을 장악한 후 티무르는 더 이상 '쿠레겐(부마)'이 아닌 '세계정복자'로서 '사힙키란'이 되어 티무르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사힙키란'으로 본인을 저술하게 하는 역사서술을 통해 비로소 티무르 왕은 칭기스 칸의 현신이 되는 '사힙키란(세계정복자)'의 전설을 시작한다.
샤라프 야즈디의 [티무르 전승기](1424)가 그린 새계정복자 '사힙키란'으로서의 티무르의 특성을 이주연 선생은 <해제>의 두번째 장 '야즈디가 그린 사힙키란 티무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승전기]의 주내용인 티무르의 광대한 영토 정복 사실
2) 천문학과 점성술, 수비학과 문자학, 메시아니즘 등의 당대 신비주의 '과학'적 증거
3) '정의로운 군주상'에 부합하는 이슬람 율법에 의한 징세와 공정한 판결의 정치
150여 년 티무르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야즈디 [승전기]의 궁극적인 저술 목적이기도 했다.
샤라프 야즈디의 [티무르 승전기](무깟디마)를 읽고난 지금,
이븐 할둔의 '무깟디마'적 역사서술 방법 이전의 몽골 제국의 연대기적 역사서술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2025년도의 아마도 마지막 책인 [티무르 승전기]는 '수비학'에 따라 티무르의 재위기간이자 자손의 숫자인 '36'처럼 올해 '36'번째 책으로서 마무리하고,
2026년의 새해 벽두는 13~14세기 몽골 제국의 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l-Din:?~1319)의 [집사(集史)]로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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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무르 승전기(자파르나마/Zafar-nama)](1424),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 이주연 편역, <사계절>, 2025.
2. [몽골제국 연대기(집사/集史)](1317), 라시드 앗딘(Rashid al-Din), 김호동 편역, <사계절>, 2024.